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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부장은 차가운 느낌을 가진 사람으로, 언제나 인텔리 특유의 독특한 오오라를 지닌 사람이었다.
술자리에 같이 가자고 부추겨도 절대 오는 일이 없고, 망년회조차 혼자서 담담히 술만 마시는 타입인데다
업무 관계로는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라 나는 그를 대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장의 해고를 알리는 사내 메일이 모두에게 도착했다.
그 짜증나는 부장이 없어진다! 마음 속으로 승리의 포즈를 취한 사람은 나뿐 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1주일 후, 부장의 마지막 출근 날. 그가 회사를 떠나는 것에 대한 형식적인 인사치례를 마치고
모두들 돌아간 그 시간. 나는 부장의 뒷정리 역을 맡게 되어 부장과 함께 사무실에 남아 마지막 짐을 정리
하고 있었다. 송별회를 치르자는 것도 스스로 거절한 부장에 대해 속으로 궁시렁대던 차에 왠일로 전무가
나를 호출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무실에 가자, 과장과 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과장으로부터「부장 해고의
진상」을 듣게되었다. 원인은 나였다. 내가 저지른 큰 업무 상의 미스를 그 부장이 모두 대신 뒤집어 써 준
것이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겹쳐 어쩔 줄 모르게 된 나는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이미 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내 책상 위를 보자, 아까 사둔 새 담배곽이 열려있었고 한 개피가 없어진 채였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메모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이 정도는 받아도 괜찮겠지」
99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무렵, 어머니가 한동안 병원에 입원하셨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때가 내 소풍날과 겹치고 말았다. 어렸던 나는 혼자 간식도 사러 가지 못했고 그냥 찬장에
보관해 두었던, 오래되어 눅눅해진 먹다 남은 다과용 과자만 적당히 비닐에 싸서 배낭에 담았다.
그리고 밤늦게 귀가하신 아버지.
「이야···우리 아들내미 내일 소풍이냐」하고 중얼거리며 배낭 안을 들여다 보셨던 아버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셨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자 버렸다.
다음 날, 배낭을 열어본 나는 무척 놀랐다. 어제 넣어둔 간식의 라인 업이 완벽히 변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과자에 작은 초콜릿에, 사탕에, 음료수에··· 아버지는 내가 잠든 후 편의점에 다녀오신 것이다.
사실, 나는 먹다 남은 그 다과라도 상관없었는데.
그 때, 아버지가 어떤 기분으로 편의점에 다녀오셨을까 하고 생각하면,
조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233
나는 17살의 생일날, 어머니가 계모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나를 낳아 준 친어머니는, 나를 낳은 후 곧바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고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지금까지 속았다는 분노와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가
갑자기 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모님의 이야기를 싹 무시한 채 방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어머니를「아줌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르면 어머니는 견딜 수 없이 슬픈 얼굴을 했다.
그 후, 내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잘해주는 어머니를 귀찮게 여긴 나는 말조차 하지 않게 되었고,
왠지 집에 있는 것도 싫어서 밤마다 나돌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가 나에게「방에서 읽어」하며 편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그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내 뺨을 때리고는 떨리는 목소
리로「어머니는…」하고 말했지만 난 울면서 내 방으로 도망쳤다.
···다음 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졸음 운전을 하고 있던 트럭이 신호를 무시하고 어머니에게 돌진했다고 한다. 즉사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건이라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고, 장례가 끝난 후에도 멍하니 있던 나에게 아버지는
너덜너덜해진 종이조각을 건내주며「읽어봐」하고 한 마디를 하셨다.
어제 그 편지였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글씨가 이렇게 써 있었다.
「OO에게
17년간 속여서 미안해. 아버지는 더 빨리 말하자고 했지만, 너에게 미움받을까 무서워하다 이렇게 늦어
버렸구나. 니 기분은 잘 알아. 왜냐하면 이 엄마는 가짜였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너를 진짜 엄마에게 지지 않을만큼 사랑하고 있단다. OO가 어른이 되어도, 신랑이 생겨도
계속…」
울면서 썼는지, 글자 군데군데가 번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떨리는 글자로 이렇게 써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만「엄마」라고 불러주지 않겠니」
내가 느낀 외로움을, 어머니는 17년이나 참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그 1개월간, 너무나도 못되게 어머니를 괴롭혔던 것이다.
「엄마…」
한달 만에야 비로소 다시 꺼낸 그 말은, 더이상 차가와진 어머니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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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거짓….
멋진 분들..
두번째 이야기에서 쪼그만 아이가 다락에서 둘둘 말려 봉인된 과자봉지를 꺼내서
비닐에 툴툴 털어서 묶는 장면을 상상하니 마음이 짠해지네요 ;ㅁ;
아아 그 부분에선 별 감흥없이 읽었는데 이 댓글 보고나니 ㅠㅠ
마음이 짠해지네요 ㅠㅠㅠㅠㅠ
1,3번째 이야기는 드라마틱한데, 2번째 이야기는 왠지 동감되는군요. 비슷한 일이 있었던지라...
아, 근데 첫번째 부장님은, 다른데 가서도 성공하실 것 같아요. 저런 센스라니.
두번째 이야기 초감동....두번째만 좀 퍼갈게요!ㅎㅎ
이 아저씨, 오랜만에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ㅅ'
99번.... 아버지의 입장에선 슬프거나 미안하거나 하는 감정 이전에 기가 막히겠죠.
저래도 제 자식이 저랬다면 당장에 편의점이든 어디든 달려나갔을겁니다.
깨어난 아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그리며 미안한 감정과 놀래켜 주고 싶은 감정을 마음에 품고 가게로 갔을, 그리고 사서 집으로 돌아가 아들의 가방에 넣었을 심정을 생각하면 참으로 부정이란게 이런거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세번째 이야기, 흔한 이야기이지만 역시 볼 때마다...ㅠㅠ
저런 상사 어디 없나...
저런 상사를 찾는것보다 저런 상사가 되는것이 빠르다는...
자식에게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말하지 말고
좋은친구가 되라고 말해라.
라는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