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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강한 요새(?) 중 하나를 들자면 콘스탄티노플이 아닐까.
그 약해빠진 비잔틴 제국이 천년을 이어갔을 정도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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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불과 7000명, 게다가 오합지졸 이탈리아 용병부대로 구성된 그 정도의 병력이 정예 10만 터키군의 맹공을
2개월간이나 막아냈을 정도니까. 최강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지.
다만 그 최후가 빗장을 닫는 것을 깜박한 탓에(웃음) 성문이 돌파되어 마침내 함락된 것이라는게 웃기지만.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앜ㅋㅋㅋㅋㅋㅋ
지금은 아무도 안계시네요. 거기 밑에 박식한분 콘스탄티노플 마지레스좀..
역시 이탈리안
저건 야사고
일단 정사는 대포로 성벽을 무진장 두들겨 박살내서 들어가게 됩니다
배도 분리한다음 재조립해서 금각만에 띄워 포격하죠
이탈리아군은 왜 약한 것인지 궁금하다면? ↖클릭
아, 이탈리아군이 주인공인 fps 게임을 해보고 싶다..
나도 칼같은게 주무기인 배경이 중세시대인 fps해보고싶던데 그런거 없는강?
나디아 / 에 [마운트 엔 블레이드]라고 그런 컨셉의 게임이 있습니다. 단지 꽤나 사실성을 추구하는 지라 칼들고 폼나게 무작정 적진에 달려들다가는 바로 시체가 되서 눞습니다-.-;
우르반이라는 인간이 존나 거포를 만들어서 비잔틴에 팔려고 했는데 거절당한 것을, 오스만쪽에서 3배인가? 주고 샀음. 그걸로 성벽 두들겨서 침입루트 확보&위에 써있는대로 안쪽 만에 오스만 해군 투입된 것 때문에 방어체계가 흔들림 -> GG
마지레스 하나 더.. 비잔틴제국 입장에선 사고싶어도 살 수가 없었던게, 일단 돈도 ㅇ벗고 (당시 비잔틴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플 하나 딸랑 남은 상태였으니; 결정적으로 '거포'라는 물건은 당시에는 공성전 외에는 쓸 데가 없었다는거죠. 고폭탄 같은 물건이 아니라 돌덩어리나 쇳덩어리를 쏴 대는 거다 보니.. 야전에서는 쏴도 걍 정통으로 맞은놈만 죽을 뿐..
더하여 당시 성곽축조기술로는 대포를 요새에 배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정도는 아니었지만,
르네상스당시 서유럽에 대포가 전파되자 성곽축조기술부터 발달했다고 하지요.
당시 서유럽의 절대 다수의 성채가, 대포를 성벽에 올려놓고 발사하면 그 성벽이 대포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야사라기보단 농담수준.......
윗분 마지레스가 제대로 된 물건이로군요.
벽을 못 부수게 해놨더니 당당하게 대문으로 들어왔다!!
요시다군, 또 현관 잠그는 것을 잊어버린거냐?
깜빡했습니다 앗 디럭스파이터!
디럭스 봄버~!
자자자자잠깐. 전투를 준비할 시간을 조금만 주게. 5분이면 되니까.
마지레스긴 한데
대포로 박살내서 들어갔다기 보다는
29일 최후의 전투에서 성벽이 돌파당했을 때 가설이 여러개 있죠
가장 유명한게 제노바 병사 하나가 쪽문 하나 까먹고 안잠궜다가 털렸다.... 요거고
혹은 방위사령관 주스티니아니가 싸우다가 부상당해 후송될때 혼란이 벌어져 후퇴했다는 말도 있고
투르크군 별동대가 북쪽 성벽을 턴 후에 방어군 주력을 측면에서 쳐서 깨졌다는 말도 있죠.
웃자고 하는 글이면 괜찮겠지만, 진짜라고 믿는 분들도 있을 까 싶어 댓글을 남깁니다.
1. 불과 7000명, 게다가 오합지졸 이탈리아 용병부대로 구성된 그 정도의 병력
- 갈라타(콘스탄티노플의 금각만 너머에 있는 제노바인의 자치구)의 주민을 제외한 서유럽인 거주자로써 전투에 참여한 자 + 제노바인을 비롯한 용병들을 모두 합친 '서유럽인'이 2천명, 콘스탄티노플 시민. 즉 그리스인으로써 무기를 들 수 있었던 자가 5천명입니다.
2. 다만 그 최후가 빗장을 닫는 것을 깜박한 탓에(웃음) 성문이 돌파되어 마침내 함락된 것이라는게 웃기지만.
- 제가 이 댓글을 쓰게 만든 오류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바깥 쪽의 흉벽 비슷한 벽, 그리고 외성벽과 내성벽의 '삼중 성벽'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 삼중성벽은 동로마(비잔틴)제국이 최전성기일 때 만들어진 것이었고 함락 직전의 콘스탄티노플에는 그 규모를 모두 지킬 병력이 없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육군 총사령관이자 제노바의 용병인 주스티니아니가 외성벽에 진주하며 방어전을 지휘했는데, 주스티니아니가 투르크의 총공격을 방어하던 와중에 중상을 입게 됩니다. 이 이후 주스티니아니의 행적, 함락 과정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평정을 잃은 주스타니아니가 황제에게 내성벽으로 가는 성문의 열쇠를 요청 - 황제가 어쩔 수 없이 수락하여 내성벽 개문 - 용병대장이던 주스티니아니가 이탈하자 방어의 주력이던 휘하의 제노바 용병 700명도 동시 이탈 - 전선의 급속한 혼란 -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술탄이 친위대 예니체리 군단에 총공격 명령 재하달 - 콘스탄티노플 함락' 입니다.
그 외의 다른 학설을 따르더라도 '빗장을 닫는 것을 깜박한 탓에 전선이 붕괴'됬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다만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총공격 과정에서 투르크의 비정규군(바시바조우크)이 제노바인들이 투르크 진영을 기습할 때 사용하던 작은 비상구, 케르코포르타를 '발견'하고 혼란을 틈타 성루의 꼭대기에 투르크의 깃발을 올리고 문을 열었다는 학설은 있습니다.
3. 웃자고 하는 말에 제가 긴 댓글을 쓰는 이유는 글의 흐름이 마치 '오합지졸 이탈리아인이 최강의 요새인 콘스탄티노플을 말아먹었다'는 식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기, 이는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무능했던 조선인이 천혜의 요새인 부산진을 말아먹었다'고 역사적 왜곡을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역사적 사실은 아무리 유머가 목적이더라도 왜곡해서는 안되지요.
콘스탄티노플 함락 과정에서 이탈리아(정확히 말해 제노바와 베네치아인)인이 주축이 된 서유럽인들은 무척 영웅적인 활약을 보였습니다. 서유럽 원군이 언제쯤 도착하느냐를 알기 위해 봉쇄를 뚫고 파견된 베네치아 선박이 죽음을 알면서도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일, 비록 전선을 이탈했다곤 하나 역시 죽음을 알면서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싸웠고, 결국 제노바로 돌아오던 선박에서 죽음을 맞은 육군 사령관 주스티니아니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윗 분의 댓글처럼 투르크의 술탄 메머드 2세가 우르반의 거포를 비롯한 화포에 큰 관심을 보였고, 화포를 채용한 것을 비롯해 당시 제국 내에 반란의 조짐이 여전히 있었음에도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단 하나의 도시에 10만 이상의 막대한 물량을 쏟아부운 것, 그리고 이탈리아인 선박에 의해 봉쇄된 금각만을 피해 선박을 산을 거쳐 '운반', 금각만의 후미에 투르크 해군을 배치한다는 기묘한 전술을 채택한 시점에서 이미 도시의 운명은 끝이 났다고 봐야합니다.
성 내에 있던 서유럽인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베네치아에서 파견된 원군이 도착하지 않으면서 끝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게 되지요.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누구라도 막을 수 없었던 운명이었습니다.
"잠그는 것을 깜박 잊었다"는 말이 바로 그 '비상구' 이야기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문이라고 해서 잠글 방법이 없이 항상 열려있을 리는 없으니까요. 잠그는 걸 깜박 잊었다는 건 정설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상당히 널리 알려진 학설인 건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직전에 그 문을 사용한 것이 바로 제노바의 용병이니, 이탈리아인들이 문 잠그는 걸 깜박 잊은 게 함락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해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죠.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마지막에 열심히 싸웠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면(솔직히 이것도 '누가' 그 사실을 전한 것인지 의심스럽기는 합니다만...전달 과정에서 적당히 윤색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 동로마제국을 그 정도로 말아먹는데 오랫동안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제노바인들과 베네치아 인들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마지막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싸운 것은 단순히 오스만 투르크라는 공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였죠. 무슨 엄청난 자기희생이라도 한 듯한 영웅적 행동으로 찬양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 밥그릇 때문에 싸운 거니까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누구라도 막을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든 것 자체가 바로 이탈리아인들입니다. 한 바퀴 빙 돌기는 했지만 결국 이탈리아인들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는 결론 자체도 그리 틀린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난 스크롤을 쭉 내렸다
네. 저도 글을 길게 쓰는 것을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라는 것이 2ch에 등록된 저 댓글처럼 간단하진 않았다는 것을 적는 과정에서 글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단 한 분이라도 몰랐던 사실을 인지하셨으면 더할나위가 없겠습니다.
케르코포르타의 문을 '발견'한 바시바조우크가 그 문을 부셨는지, 아니면 잠겼어야 할 문이 열렸던 것인지, 열렸다면 그리스인의 담당인지 또는 제노바계 용병대의 담당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사용=관리 담당은 아니니까요). 애시당초 케르코포르타를 이용해 콘스탄티노플의 망루에 깃발을 꽂고 성문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인으로 추측되는 몇 가지 설'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계 용병대의 활약은 당대에 그 객관적인 서술의 면에서 정평이 나있던 베네치아계 '현장 참여자'가 베네치아 원로원에 보고한 내용, 개인이 기록으로 남긴것 등이 모두 학자들의 다양한 토론을 통해 충분한 수준으로 입증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동로마제국은 소아시아 영토를 잃었던 무렵부터 이미 강대국이 아닌 상태였습니다. 꽤 오랫동안 서유럽인들이 비잔티움 제국을 '가장 칠칠맞은 제국'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1차 십자군이 시작되는 시점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명목상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예루살렘 주위의 영토에 대한 봉권적 수위권조차도 쉽게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 동로마 제국의 현실이었습니다.
베네치아 이하 서유럽 국가들이 동로마 제국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패망에 힘을 실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임을 온전히 서유럽 국가들에 돌릴 수는 없습니다. 로마 제국 패망의 '결정적 원인'으로 게르만계 민족 대이동이라는 하나의 이유만 꼽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물론 함락 직전의 콘스탄티노플에 지원군을 보냈던 교황청, 제노바, 베네치아는 각자의 이익 계산에 따른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인이 유럽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안타깝게 여길 이유는 전혀 없지요.
하지만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인종, 나라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목적이 웃음이라 하더라도 사실을 왜곡해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탈리아인은 천사의 성품을 가진 민족도, 영웅들만 뭉친 민족들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보 천치들만 모인 민족들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군대, 군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우스갯소리로 나온 일부 사례를 전체화하여 해석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드리고 싶었고, 그래서 긴 댓글을 썼습니다.
貴腐人 시오노 아줌씨가 전쟁 3부작의 첫째로 이것을 선정했죠. 여기서는 주스티니아니 패닉설을 따랐더군요.
그리고 당시 모인 이탈리아 용병대는 지금처럼 '즐거운 이탈리아군'이 아니라 정예 중의 정예 ;ㅁ;
역사덕후라면 안짚고 넘어갈 수 없는 글
일본 사람들은 2차 대전 관련에서 이탈리아를 웃음거리로 삼기 좋아하는듯 하니, 그게 여기서도 반영된 거일지도요. 그게 없으면 최고의 술안줏거리는 반자이 어택이라 그런건가...
울나라서도 밀리터리 관련 커뮤니티 가면 이탈리아 하면 반드시 까이고 지나가던데요. 일본만의 얘기는 아닌ㄴ듯
2차 대전기에도 잘 싸운 이탈리아군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산 마르코 연대 (훗날 사단)가 유명하죠.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 지휘관 폰 아르님 장군은 독일군보다도 이탈리아군인 산 마르코 연대의 전투력을 그가 지휘해 본 병사들 중 최고였다고 극찬했었지요.
참 역사적으로 아이러니 한것은 이거죠
베네치아는 공국입니다.
그렇다면 공작위는 어디에게 받았을까요?
바로 동로마제국이죠
사실 동로마제국이 약화된 결정적인 역활을 제공한 것인 베네치아계 상인들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었다지만, 결국 최후까지 동로마제국을 위해 피를 흘린것은 베네치아라는 것은 참 여러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아무튼 이 일로 비잔틴의 생존자들이 러시아와 이탈리아로 도망쳐 이후 문화적 변혁을 겪게합니다
베네치아는 공화국이고 역활이아니라 역할이겠죠.
베네치아 원수는 비잔틴 제국이 부여한 달마티아 공작의 칭호를 가진 건 사실입니다. 보기에 따라선 달마티아 공작이 통치하는 나라라고 할 수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공국이라고 하기엔 좀 거시기한듯.
베네치아 도제(통치자)의 정확한 명칭중 하나일 뿐이죠 달마티아공작은... 실제론 베네치아가 점령한 땅을 동로마가 시칠리아를 먹은 노르만의 침략을 막기위해 기정사실화해 무늬만 작위를 준것입니다.
그저 질문인데, 약해빠진 비잔틴 제국..이라고 하는데 어느 시기가 보통 비잔틴 몰락 기점입니까?
상식선에서만 알고있는 제 수준에선 4차 십자군 이후일까 라는 정도의 생각이긴 한데.
비잔티움 제국이 강대국일 수 있었던 시점은 만지케르트 전투가 중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전투에서 황제는 포로로 잡히고, 이어 내란이 발생합니다.
전투 자체는 큰 손실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물론 있지만, 그 전투의 결과로 겨우 제정의 안정을 찾던 비잔틴 제국은 다시 큰 정치적 혼란에 빠지고, 제국의 변방을 지키고 많은 병력을 제공하던 군관구가 손실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나톨리아, 즉 소아시아 내륙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게 된 시점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든다고 봐야 합니다.
그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무기력함은 2만명이 채 못되었다는 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라틴 제국'이 건국된 것으로 다시 한번 확인되게 됩니다.
오오. 이거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4차 십자군이 없었더라도 결국 비잔틴은 터키에게 박살났을 겁니다. 잘해봤자 노쇠한 제국이 유럽을 지배할 기세의 강대한 터키를 막을 수 있었을 리가 없죠. 실제로 방벽이었던 비잔틴이 멸망한 후 유럽은 터키의 공포에 떨게 됩니다. 어쨌거나 잘나가는 나라 옆에 있으면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망한다는 것.
대략 투르크인의 침공에 의해 아나톨리아가 증발하는 시점에서 국운이 기울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 할듯 합니다.
도제가 달마티아,이스트리아 공위를 소유하긴 했지만 공국은 아니죠.
그저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에서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읽읍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