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흔히들 그렇듯이 한때 삐뚤어진 젊음을 동경했다.
도둑질이나 약한 아이들에 대한 협박 등을 반복하던 그때-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점원에게 잡혀, 부모님의 연락처를 불게 되었다.
부모님은 안계시다고 거짓말을 하고 어차피 할아버지는 왕진을 가셔서 안 계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말했다.

그러나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곧바로 흰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가 가게로 달려오셨다.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마루바닥에 이마를 조아리고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사과를 하셨다. 어릴 적부터 나의 자랑이었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보기 흉하게 굴욕적으로 사죄를
비는 모습을 보노라니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져서 나도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바닥에 어느샌가
머리를 조아렸다.

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쭉 아무 말도 없었다.
역정을 내시지도, 뭔가를 묻지도 않고 그저 침묵.
오히려 그게 더 괴로웠다.

집에 곧 도착한다, 싶을 무렵 갑자기 할아버지가

「너 술 마신 적 있냐?」

하고 물으셨다.

「없어요」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좋아, 가르쳐주마」

하고 한 마디 하신 후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착한 앞은 스넥바 같은 곳.
거기서 취할 때까지 술을 먹게 되었다.
평상시 일하는 모습 밖에 본 적 없는 할아버지가
술 마시는 것을 보는 것도,
함께 이런 곳에 있는 자체가 어쩐지 이상했다.
두 사람 모두 만취한 상태로 돌아가는 길 인근의 강가에
앉아 쉬고 있자 할아버지가 불쑥

「이 할애비는 일 밖에 몰랐어.
 너는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다 경험해볼 수 있으니 부럽구나. 
 너는 남자다.
 가끔은 나쁜 짓을 해보고 싶기도 할게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좋다.
 다만 인생을 그르칠 정도로 큰 나쁜 짓은 저지르지 말거라」

그 말을 들으니 왠지 긴장의 실이 끊어지며 한참동안이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내 삶이 바뀌었다.
할아버지같은 의사가 되기로 결정,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재수까지 해가며 국립대 의학부에 합격했다.

올해, 졸업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낡은 집 외에
또 하나 남겨 준 것.
그것은 매일 목에 걸고 계셨던 청진기.
그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때에도 목에 걸려 있던 청진기.
그 청진기를 겨우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녹이 슬어버렸지만 그래도 나의 보물.

나도 할아버지같은 의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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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ㅁㅁ 2009/03/31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리플 후감상 ㄳ
    꺅 첫번째 리플 ㅜㅜ

  2. lakemisty 2009/03/31 1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할아버지군요.
    닥터 고토진료소를 읽은 후라
    더욱 멋져보이네요.

  3. kenjak 2009/03/31 17: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감님 멋있어!!

  4. 하나 2009/03/31 17: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아아아아앙 ㅠㅠ
    머시써 ㅠㅠㅠㅠㅠ
    감동적이네요. 으윽!

  5. 공대생 2009/03/31 1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저런 할아버지가 내게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6. 심영 2009/03/31 1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보시오 의사양반 ..

  7. DaFlea 2009/03/31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나도 부러워~
    저 손자가 부러워~~

  8. ㅇㅇ 2009/03/31 18: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흰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가 가게로 달려오셨다"
    "그것은 매일 목에 걸고 계셨던 청진기.
    그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때에도 목에 걸려 있던 청진기."

    흠.. 과연?

  9. ... 2009/03/31 1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언제부턴가 리라하우스에서 감동글을 기대하면서 들어오게 되었어..

  10. 마술potato 2009/03/31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번역 감사합니다 _._

  11. john6 2009/03/31 2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네요, 이런 글도.

  12. 선배거긴안돼 2009/03/31 2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의사만 있다면 세상엔 살기 좋은 거군요

  13. 샤넬붕어 2009/03/31 2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사선생님께서 자라나는 청소년한테 술을 맥이셨을까요?;

    • 만차스 2009/03/31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난독증..인지..
      의사로써도 뭣도 아닌
      하나의 할아버지로써 손자를
      대하신거라고 생각합니다

  14. teal 2009/03/31 2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밖에 모르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그런의사?

    • 까칠 2009/04/01 0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밖에 모르다가 나중에 후회하기 싫어서... 백수라도 될까요?
      이런 댓글 촌철살인의 재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도 쿨하지 않아요. 좀 자기 감정에 솔직히 삽시다.

    • teal 2009/04/01 2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백수라뇨 좋은의사되야죠 저도 노력중이랍니다

  15. ㅇㅇ 2009/03/31 23: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량아 주제에 날 울리지마라

    휘밤 ㅠㅠ

  16. D.D 2009/04/01 0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당시 옛날엔 적어도 저런 할아버지의 옛 지혜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받아들이는 풍조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즘엔 "과거"는 트렌드가 지나고 "현재" 나 "미래"가 지향해야할 무슨 "이즘"처럼 번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도 할아버님집에 가끔놀러가곤 했는데 "주역"정도를 공부하시거나 밭에 농삿일을 꾸리는 정도의 일을 하시고계셨습니다. 근데 저희가 너무 어려서 그런가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시기 보다는 -할애비죽으면 몇일을 울 것 인가- 정도의 얘기를 해주시곤 했는데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들중에 이해가 되는 얘기가 저 얘기 밖에 없어서 저것밖에 기억하지 못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ㅠㅠ 커서 좀 찾아가려고 해도 몸이 좋지 않으셔서 ㅜㅜ 아 할아버지 오래사셔요 ㅠㅠ

  17. ke 2009/04/01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손자야 반성의 시간이다.
    곧휴에 알보칠을 발라주마.

  18. 루넨 2009/04/04 1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영향으로 한 때 교사가 될까... 했던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물론, '교사가 될거야'라고 하니 가장 역정을 내셨던 것도 할아버지셨습니다만... (아무래도 평생을 교사 하시다 보니 그 직업의 힘든 점, 그리고 제 성격이 교사에 극히 맞지 않는다는 점 등을 알고 그러신 것이지만...)

  19. 2010년12월 2010/12/15 1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감동적이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