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항아리

5ch 컨텐츠 2009/04/08 13:17

전국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력한 가신이었던 마키노 야스나리에게 한 상인이 차 항아리를 팔러왔다.

상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대단히 귀한 차 항아리로, 차에 대해 잘 몰랐던 마키노는 그것을 큰 돈을 주고
구입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것은 엉터리 위조품으로 판명되어 마키노는 큰 손해을 보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키노를 차 단지와 함께 불렀다.

「이런 위조품을 큰 돈을 주고 샀단 말인가! 내가 척봐도 위조품인 것을 알겠거늘, 너는 바보란 말이냐!」
「예, 옙, 저는 참으로 바보같은 짓을….」

너무나 풀이 죽은 마키노를 바라보던 히데요시는 그 모습이 딱해보였던지

「좋다, 너 정도의 사무라이가 이런 일로 손해를 보는 것은, 이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라며 차 항아리의 대금에 황금 한 덩어리를 더해 마키노에게 하사했다. 놀라고 감격한 마키노가 자신의
주군 이에야스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자, 이에야스도 재미있어하며

「호오, 가짜 차 항아리가 큰 돈을 낳았구나」하고 감탄했다.

그리고 그 차 항아리는「과전의 단지(科銭の壷)」로 불리며 천하에 소문이 퍼졌고 마키노 가문의 가보로
전해졌다.

위조품이 진품이 된 이야기.

트랙백 주소 :: http://newkoman.mireene.com/tt/trackback/2458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우오오옷 2009/04/08 1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인가........

  2. 므어어엉 2009/04/08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등인가.........

  3. 흐어어엉 2009/04/08 14: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등인가.........

  4. dfff 2009/04/08 14: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날 일본에서 낮은 계급이 높은 계급한테 불손하면 바로 칼맞아 죽어도 상관없다고 들었는데, 그럼 저 상인도 그냥 죽여도 되는거 아닌가요?

    • z 2009/04/08 14: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상인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 찾아가나염 ㄹㄹz

    • 두치오 2009/04/08 1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먹튀에는 답이 없죠...

    • 음? 2009/04/08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키리스테고멘을 말씀하시는건가요? 그건 그렇게 함부로 행해질수 없었고 실제 사용된 일도 별로 없습니다(...) 먼나라이웃나라의 영향인가

    • 옹냐. 2009/04/08 1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쩌는 마지레스 소환글..

      저도 무한의 주인 보면서 궁금했던게...

      1. 등장인물중 마가츠 타이토가 어린시절 자신의 동생이 사무라이의 말을 놀라게 했다는 이유로 베어져 죽었다며 그래서 사무라이들을 싫어한다고 하길래 어? 정말 저렇게 막 죽여도 돼? 이런 생각이 들었었고,

      2. 하쿠린이 관청에 복수여행을 허가 받으러 갔으나 허락받지 못했다는 대사가 나오길래 옛날 일본에서는 개인의 원한을 개인이 처리하는 것을 허가하는 경우도 있었나? 요런 궁금증도 있었고,

      3. 만지가 백명 죽이고 튀었다고는 하지만 일정 거처를 가지고 숙식하고 있는데 그걸 관에서 그냥 묵인한다는게 신기했던...(아 이건 스토리상 그냥 봐주는 거로 나중에 나오던가...? 본지 오래되서 긴가 민가 하네요.)적이 있네요.

      실제 일본에서 옛날에 저러지는 않았겠죠? 사실 무한의 주인이야 사극이라기 보다는 환타지물로 보는 편이라...

    • 으음... 2009/04/08 1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옹냐님/ 봉건제 때문이죠. 그 뭐냐, 아무리 막부 통치라지만 각 지역의 영주 끗발도 무시할 수 없잖습니까.
      예를 들어 살인자는 영주A 똘마니고 피살자는 영주B 똘마니인데, A와 B가 앙숙이다... 이런 자존심 싸움은 막부도 뒷끝 없게 중재하기 힘드니까 그냥 '현피 뜨고 쿨하게 끝내셈'하는 거죠. ^^;;

    • 미소녀 2009/04/08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 두치오님 말씀대로 먹튀에는 답이 없죠...

    • 도라 2009/04/11 0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진짜 먼나라 이웃나라의 영향인듯

  5. IRIS 2009/04/08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왜 도쿠가와 이에야스 부하에게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돈을 주는 게죠;;;;?

    • 두치오 2009/04/08 15: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충 당시 상황이
      도요토미가 사장이면 도쿠가와는 부장급 정도니까요...
      도쿠가와네 부서의 애가 저런일 있으니 사장이 불러와서 위로금 준게죠...

    • rab 2009/04/08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의 배포는 굉장했습니다. 빈농 출신이라는 컴플렉스도 작용했겠지만, 돈을 써야 할 때는 호쾌하게 뿌렸고 그것이 천하인다운 그릇으로 칭송받았죠.(임진왜란도 이런 호쾌함 과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재의 마음을 얻는 전략이기도 하겠죠. 실제로 저 배포에 반했는지 어쨌는지 도쿠가와의 중신 중 중신인 이시카와 카즈마사가 히데요시쪽으로 가서 도쿠가와는 군제 개편하느라 법석을 떤 것도 사실이고.. 전설로 남은 사나다 유키무라가 토요토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도, 히데요시가 유키무라의 젊은 시절 그를 각별히 총애했기 때문입니다.

  6. OPAL 2009/04/08 1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품위유지비!

  7. C 2009/04/08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상인에게 큰 죄를 물어 황금 두 덩어리를 뺏었다.

  8. 여기서 끼어들자면 2009/04/08 2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복수라는 행위는 관습법으로 동아시아적으로 인정받던 것이라 --;; 실정법상으로는 있어서는 않돼는 일이지만 조선에서도 복수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

    • 달윈 2009/04/09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동아시아만 그런게 아니에요. 유럽에서는 중세 암흑기까지 vendetta 라고 하여, 친족의 무고한 살해에 대하여 복수가 인정되었습니다. 햄릿또한 vendetta 풍습의 연장선이라고 하죠.

    • Clyde 2009/04/11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친족 살해 정도면 다행이게요. 유럽에서는 18~19세기까지도(나라나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귀족 남자가 다른 귀족 남자에게 모욕을 당했는데 결투로 복수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 받았습니다. 결투를 법으로 여러 번 금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네요.

  9. soyokaze 2009/04/10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레스 입니다.
    일부에선 [키리스테고멘]에 대해 과도한 환상을 가진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위키페디아 일어부문의 [키리스테고멘]항목을 번역해 올립니다. 문법이 정확하지 않는 부분도 많아 죄송합니다.점선이하가 번역문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반적으로 [키리스테고멘]은 행하는 무사쪽에서도 매우 리스크가 높은 행위였습니다. 백성이 무례를 범해 베었다고 인정을 받더라도 실제 그 백성을 살해했을 경우에는 [검봉으로 쳐 벌하면 충분할 것을 목숨까지 뺐았은 행위는 과도했다.]라는 판결을 받아 무사계급 박탈과 추방형을 받은 케이스도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키리스테고멘

    개요

    근세에 있어 일반 백성으로 부터 참을 수 없는 무례를 당했을 경우 무사는 그 백성을 베어 죽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 에도막부의 법률인 [공사방어정서]71조에 명기돼 있다. 단, 이것은 무례한 행위로 인해 무사의 명예가 피해를 입는 것을 제지하기 위한 정당방위적 행위로 인식돼 있어 무례를 범한 사실 자체에 대한 처벌은 아니다. 근대이전 유럽의 법률과 근대의 법체계에 있어 명예의 침해에 대한 정당방위는 인정되지 않거나, 또는 법익균형의 관점에서 생명의 침해로 보복하는 행위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통설(단, 근대이전에는 결투에 의한 명예회복은 가능했다.)이었다. 이것에 대해 일본의 [키리스테고멘]에는 지배계층인 무사의 명예와 위엄을 보호함으로 의해 무사를 정점으로 한 당시의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져, 이러한 관점으로 부터 [키리스테고멘]이란 제도가 인정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의 일환이란 인식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대가 죽는 경우는 있어도 최후의 일격을 가해 임의로 숨통을 끊지는 않는 것이 통례였다. 또한 무례한 행위와 그에 대한 [키리스테고멘]은 연속할 필요가 있어 이전 행해진 무례를 이후 다시 문제삼아 [키리스테고멘]을 행하는 것은 처벌의 대상이었다,

    키리스테고멘을 행한 후의 경과

    대상을 벤 후에는 신속하게 관청에 신고할 것, 어떠한 사정이 있었더라도 사람을 벤 책임의 무거움이 있기 때문에 20일이상의 자택근신에 명해 짐, 사용된 카타나는 문초에 사용되는 증거품 취급을 받아 조사를 위해 일시 압수됨, 무례한 행위와 그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할 증인이 필요함 등 [키리스테고멘]이 적용되기 위한 조건은 매우 엄격했다. 증인부재등의 이유로 백성을 벤 것이 [키리스테고멘]으로 인정되지 않을 경우, 그 무사는 처분을 받아 최악의 경우 무사의 명예를 지킨 채 죽는 할복조차 할 수 없이 참수형에 처해져 가문의 대가 끊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 때문에 무사 본인이 근신 중 집안 사람들과 가신들이 혈안이 돼 증인을 찾고, 찾을 수 없다고 판단됐을 경우엔, 무사 본인이 체면을 지키기 위해 문초가 시작되기 전 자진해서 할복해 목숨을 끊는 경우가 빈번했다. 또한 [키리스테고멘]을 위해 카타나를 뽑았지만 상대가 도주했을 경우에도 무사의 불명예로 쳐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키리스테고멘]이 부당하다고 느낀 자는 [키리스테고멘]을 행하는 무사와 어떠한 신분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와키자시(무사가 휴대하는 두개의 카타나 중 짧은 쪽)를 이용한다면 대항하는 것이 허가됐다. 오히려 [키리스테고멘]을 당하는 사람이 무사계급의 경우, 무저항으로 베어지면 국가진보수, 외적제정압(군사경찰력)을 담당하는 병력인 무사로서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평가돼 살아 남는다고 해도 무사계급의 박탈, 재산의 몰수등 엄한 처분을 받기 때문에 [키리스테고멘]을 하는 쪽, 당하는 쪽, 모두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했다. 그 때문에 높은 신분의 무사가 하급무사를 [키리스테고멘]으로 처분 할 경우 [죠이 우치라고도 함], 당하는 상대에게 와키자시를 건네 주고 도발해 반항하면 즉석해서 벤다라는 형태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사도적 태도가 예상과 어긋난 결과도 있었다.

    - 오와리번 가신 토모가이 사헤이지는 노상에서 백성과 부딛혔다. 사헤지가 사과할 것을 요청했음에도 백성은 무시하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사헤이지는 무기가 없는 백성을 베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자신의 와키자시를 상대에게 넘겨주고 결투의 형식을 취하려고 했지만 백성은 그 와키자시를 든 채 도주한 뒤 '사헤이지와 싸워서 이겼다.'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악평이 퍼진 사헤이지는 불명예로 인해 고향을 떠나 도망칠 수 밖에 없어져 무사로서의 최후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 백성의 집을 알아내 백성일가를 몰살 하기에 이르렀다.

    또, 타 번의 영민에 대한 위해행위는 가령 정당방위인 [키리스테고멘]으로 인정되더라도 그 영민이 속한 봉건영주에 대한 적대행위로 판된될 위험이 있었다. 요컨대 막부직할지인 에도에서 백성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토쿠가와 막부에 대한 반역행위로 보여질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각번은 에도주재 근무자에 대해 직접 [키리스테고멘]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백성들과의 불화를 피하고 아무쪼록 자중할 것]이란 의미의 훈령을 누차내린 바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래서 간단히 벨수 없다는 사정을 알고 있던 백성들 중에는 풍류를 자랑하거나, 담력시험등을 위해 고의로 무사를 도발하는 언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의 불손한 언동을 그냥 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백성으로 부터 모욕을 당한 채 아무 대처도 하지않을 경우엔 또한 겁쟁이란 비난을 받아 [시도불각오]란 죄목으로 처벌을 받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무사는 이러한 치욕을 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 시종없이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위는 피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극장과 같이 백성과의 밀접한 접촉이 상정되는 장소에의 방문은 극력 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과 같이 [키리스테고멘]은 무사의 특권으로 인정돼 있기는 했지만 마음대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정당한 행위로 인정받지 못했을 경우의 리스크가 높았기 때문에 실제 [키리스테고멘]을 행하거나 그 후 사실로 인정된 사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주종관계와 키리스테고멘[또는 부라이우치]

    주인이 부적절한 행위를 한 가신을 벨 경우에도 부라이우치[죠이우치]라고 한다. 이 경우의 가신에는 무사뿐 아니라 하인 등 무사이외의 고용인도 포함됐다. (이론적으로는 일용직의 고용인도 대상이었다.) 주종관계에 있어서의 부라이우치는 주인의 가신에 대한 처벌권의 행사로 생각돼 상기와 같은 엄격한 규정은 적용되지 않고 살해자체에 대한 형사책임도 없다. 또한 정당방위가 아닌 처벌이기 때문에 최후의 일격으로 대상의 목숨을 끊는 것이 보통이다. 단 이와 같은 처벌을 행할 경우 가신에 대한 관리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돼 [가중부취제](가신의 단속부족)의 죄목으로 면직 또는 폐문이란 엄한 처분을 받는 일도 있다.

    • 김왕장 2009/04/09 0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사 불쌍하다. 베도 처벌, 참아도 처벌.

    • ehejfl 2009/04/09 15: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키피디아라.... ㅋㅋㅋㅋㅋㅋ

    • soyokaze 2009/04/09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키페디어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부분을 지적해 주십시오. 또한 [키리스테고멘]에 대한 내용은 일반적인 역사적 정설에 부합하고 내용이 잘 종합돼 있어 인용한 것입니다. 다른 역사관련서적을 통해서도 동일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습니다.

    • 그게아니라 2009/04/10 0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키피디아 라니깐요.

    • soyokaze 2009/04/10 0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위키페디아가 맞는 표기였습니다. 실례했습니다.최초의 본문은 수정했습니다.

    • ki 2009/04/10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키피디아가 맞는거 아닌가요.
      네이버 사전 봐도 표기가 위키피디아로 나오는군요.

    • 페퍼포그 2009/04/12 1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용인에 대한 처벌은 별 제한이 없었다면...
      자기를 모욕한 백성을 우선 자기 수하로 채용한 뒤
      그 뒤에 벌하면 되겠...(뭔가 이상한데 OTL)

    • 지나가다 2009/04/13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보다 댓글이 더 유익했던 사례네요.

      soyokaze 님의 번역 감사합니다.

    • 지나그네 2009/04/21 16:02  댓글주소  수정/삭제

      soyokaze님,
      우연히 위 댓글을 보고 글을 씁니다.

      위키피디아는 일종의 집단지성의 산물로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실로 여기는 것이 담기는 것이지
      반드시 진실이 담긴다고는 할 수 없답니다. 예를 들어 전에 미국의 한국 근대사 교수가 말하길:
      미국 6.25전쟁 관련 부분을 보니 일방적으로 미국이 사심없이 한국을 도운 것으로만 적혀있어서
      자기가 전문지식을 동원해서 자세한 경과를 적고,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도 있었던 점, 미국도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것등을 근거까지 전부 명기해서 올려놨는데 며칠뒤 가보니
      다시 그전으로 돌아가있더라는군요. 다시 몇번 고쳐봤지만 역시 소용이 없어 그만두었다더군요.
      즉, 가장 많은 사용자를 자랑하는 미국인의 편견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일본도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이 활동하고 있고, 또 서양인 중에도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거나
      심지어 환상을 품은 사람도 많습니다. 위와 같은 주제에 대해 "비록 지금 보기에 이상한 규정이지만
      실제로는 잘 안 행해졌고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 사실은 일본은 중세에조차 인권을 소홀히
      하지않은 훌륭한 인권국가였다"라는 식의 설명이 붙었다고 그걸 다 사실로만 여길 수는 없다는거죠.
      역사적인 사실도 입맛에 맞는 것만 취사선택하면 얼마든지 왜곡된 사실을 뒷받침하는 사료로
      가공해낼 수 있죠. 위키피디아는 참고로 보아야지 거기 실린 내용을 다 사실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 soyokaze 2009/04/25 0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답글에도 달았던 것 처럼 위키페디아를 인용한 이유는 내용이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기의 [키리스테고멘]에 관한 내용은 기본적인 정설로 다른 역사책을 찾아 보셔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역사서 한권을 다 번역할 수 도 없고 제가 개인적으로 내용을 간추리기에도 시간이 없으니 번역한 것일 뿐 위키페디아에 적혀 있으니 다 사실이다란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경우에 문제인 것은 일본이 관련된 사안이라면 어떻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흠을 내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고질적인 혐일사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키리스테고멘]은 과거의 제도로 그것이 무차별 살인면허였건 형식적인 제도에 불과했건 그 제도에 현재의 가치관을 적용해 인권이다 비인권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조선의 경우에도 노비제도가 있었는데 이것도 현재의 잣대로 볼때 있을 수 없는 비인권적 제도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걸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지요. 역사를 회고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0. 벨스타 2009/04/09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옹냐님 'ㅅ' 실제 일본에서는 '복수'를 위해 결투를 신청하는 것을 관에 허락받고 행하는 제도가 있었다고 하네요. 음 자세한 조건은 기억안나지만, 일단 현재의 대에서 복수는 종결되는 것도 조건 중 하나로 압니다. 즉, 자식이나 후손대대로 뭐 복수에 복수를 낳으면 안되니까, 그런 것 같네요. 키리스테고멘하고는 다른 걸로 알아요~기억나는 결투로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아간 아들과 당사자가 결투를 벌인 기록이 있는데, 싸움 도중 둘 다 거진 치명상을 입고 가망이 없음을 알고 '합의 하'에 동시에 서로를 찔러 죽은 케이스도 있었다네용~

  11. 꼬알 2009/04/09 2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ㅋ네ㅋ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