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오늘은 당신이 빨래 좀 대신 해줘요」
남편 「내일 니가 해」
마유라// 그것대로라면 카구라히메전설(던가의
자전거 & 메이드 버전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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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깜빡
아키바를 지나던 젊은 오타쿠청년은
역 앞 자전거 주차장에서 자신을 부르는 듯이
깜빡깜빡 빛을 내는 자전거를 발견했어요.
그건 좁은 프레임 사이로도 알아볼 정도로
근사한 메이드상이 그려진 이타챠리였어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지나가던 상냥한 오라버니.
작고 좁은 자전거 프레임 안에서 절 꺼내주세요."
자전거 프레임 속에서 들려오는
좋아하는 성우의 17세 쯤과 쏙 닮은 목소리에
그만 가슴이 두근 거려버린 오타쿠 청년은
모에만으로 타오르는 마음과 운동부족인 깡마른 육체와
핑크빛 뇌내 마약으로 가득한 두뇌를 총 동원해
프레임을 꺾어보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가볍고 강한 티탄 프레임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옳지 이럴땐 가스 토치를 빌려오면 되겠구나!'
생각한 오타쿠 청년은 전자상가마저도 밀려나고
세계적 모에 상점가가 되어버린 아키바를 다 뒤진 끝에
겨우겨우 가스 토치를 발견 올 수 있었어요.
슈아아아아아
오타쿠 청년은 싯퍼런 불꽃이 튀어오르는데도
급하고 급한 마음에 안전장비도 없이 프레임을 절단하기 시작했어요.
가스 토치는 사실 프레임을 순식같에 녹여버릴 정도로 강력했지만
그 안에 들어있을 좋아하는 성우(중략) 메이드가 혹시나 다칠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천천히 프레임을 자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3분 후.
인근 주민의 신고로 오타쿠 청년은
그만 체포당하고 말았답니다.
-END-
몇살까지 아동인거야? 10살이라도 굉장한 녀석이 있고 15살이라도 조금 미숙한녀석이 있고
심지어 성인이어도 아동틱한녀석은 얼마든지 있다고.
실제론 어떻지? 나이로만으로 그것을 구분하는가?
나이만으로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로리콘은 로리콘 나름대로의 미학이 있다.
최근 일본에서 논의가 되고 있고 일부 실행되고 있는
아동포르노금지법안은 2차원상의 표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서구쪽에서 보기에 일본의 어린 캐릭터를 섹시하게
혹은 아예 섹스심벌로 등장 시키는 것이 아동성도착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클레임때문이라고 하지요.
'이 게임에 등장인물은 모두 18세 이상입니다'라는 문구도
그 법안을 위해 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최근에는 털이 나지 않은표현이라던가(...)
외관상 어린이를 연상하게 되는 신장비까지도
엄격히 단속할 것이라는 수정안도 나와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반대표를 당당히 던지기에는 미묘한 문제라
표면적인 반대는 그리 크지 않다고도 합니다. [...]
1
그 외는 모두 서양에 뒤지잖아?
4
게임도 자랑할만하겠지
5
최근의 애니메이션들은 자랑할 수 없지만
18
1등은 아니지만 자동차 산업도 자랑할만해
19
미국(IC)
독일(자동차)
프랑스(빵)
중국(철공)
오스트레일리아(육우)
캐나다(펄프)
브라질(커피)
인도(카레)
일본(애니메이션)
42
자랑할 수 있다, 라고 말하지만 세계에서 보면 일본인은 오타쿠 집단으로 밖에 안 보인다는 소리 아냐?
47
만화와 게임의 거리 아키하바라가 정말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거리인가?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55
아니, 애니메이션 따위가 자랑할만한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 것도 없는게 좋아
마이너스는 없는 편이 좋다
73
휴대폰의 기능성과 보급률도 제법 자랑할만하다고 생각해
75
>>73
기능에 관해서라면 한국이 최강
78
휴대폰 분야에서는 한국을 절대 이길 수 없어
휴대폰 디자인이라면 혹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86
2ch같이 초 비매너게시판 사이트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89
>>86
있다. 얼마든지 있다.
95
왜 라멘을 빼는거야!
160
일단 냉동식품과 레토르트는 세계 최강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63
>>160
중국은…
247
굳이 자랑할 필요가 있나?
375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일본은 저질이라고 생각해요……
48
애니메이션 빼면 뭐가 있는데?
설마 아무것도 없나?
아무 것도 없다면 그나마 애니메이션이라도 있는 것이 좋겠지
52
총리가 될 수 있는 천재 침팬지가 있잖아!
375>> 그 일본 노래를 즐겨 듣는 나는 역시 저질이었나
자랑할 것, 야겜도 있다.
특히 일루젼. 양키 3D야겜 해보면 진짜 공포스러워서 이게 야겜인지 호러 게임인지 알 수가 없다고.
일본 음악이 저질이라니. 대체 일본 중고등학생 50%가 밴드를 한다는 소문은 어떻게 된 건지. 역시 2ch 말은 귀담아 들을 게 못 되는군요.
일본에 애니메이션이 많이 방송되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는 드라마라고 보셔도 됩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만큼 드라마 많이 방송하는 국가는 미국정도입니다.
퀼리티 좋고 배우 연기 좋지요.
다만 항상 내용이 불륜,근친같은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건 그렇고 일본vipper들은 경제활동 전혀 안하는 건가?
일본의 화학공업과 부품기술은 다른나라를 초월한지 오래라고!
한마디로 일본의 화학공업 업계는 우리나라의 조선업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국 휴대폰이.. 좋던가..
-_-; 뭐 좀 된 얘기지만 예전에 한국 폰 게임 개발할때... 마다 중간에 했던일이..
일본에 가서.. 일본 폰 사서.. 게임을 담아오는 거였는데 말입니다..
..... -_- 수준이 틀렸는데.. 폰 CPU가 다르구나...를 절실히 느겼죠...
뭐 몇년전 얘기라서.. 그 사이에 얼마나 변했을꼬... 국내 폰 성능이....
느끼는거론... -_- 5년전에 본. .일본 폰 CPU보다 아직 떨어지는 느낌인데..
현재 노키아 >> 삼성 > 모토롤라 > 엘지... 랍니다. 모토롤라는 삼성한테 지난 해 따라잡혔고, 올 1분기 성과는 끔찍해서 엘지한테도 곧 발릴 것 같습니다.(모토롤라의 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슬프면서도 한국인으로서 기쁘달까. 복잡해요.)
덧붙여서 노키아 저가폰... 은 정말 부담없이 사서 열받으면 좀 집어도 던지고(...) 그래도 되겠습니다만, 고가폰은 장난 아니랍니다. 기술적인 면에서 삼성이 앞선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특히, 애니콜이 불통된 지역에서 모토롤라나 노키아가 터지는 걸 보면 말이죠. 통신회사 쪽 문제는 아닙니다. SIM카드를 서로 바꿔 끼워봐도 그랬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사형은 너무 편하게 죽이는 거라고 생각함.
무기징역은 너무 오래 끄는 거고..
범죄의 정도에 따라 1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쳐서 육신과 정신을 동시에 다진 마늘로
만든담에 거름이 되는 과정을 피해자나 가족들도 의사에 따라서 참관할 수 있게 하는
정도는 해줘야 된다고 봐요.
그나저나.. 진짜 있었던 일인가요? 옆나라 일이지만 말이 안나오네요. 콘크리트 여고생
사건 이후로 짧고 굵게 한방 날려주는 군요.
저 모토무라라는 사람이 남편인데, 저 사람이 범죄 피해자 가족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죠.
그 단체가 국회에 요구해서, 범죄 피해자 보호법이라는 법이 만들어졌는데, 간단히 얘기하면 피해자 및 그 가족이 가해자의 형사재판에 관여할 수 있게 한 거죠.
근데 이게 과연 바른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형사재판은 어디까지나 사회 질서를 어긴 자에게 제재를 가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보복의 장을 마련해주기 위해 여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티비에 나온 것만 보면, 저 남편놈 태도가 상당히 거슬립니다. 판결이 자기 맘에 안 들면 까는거죠 그냥. 뭐 이번엔 사형판결 나왔으니 조용합니다만.
땅콩샌드//
그래서 실제 사형 언도 기간까지 10년정도 시간이 주어집니다.
게다가 사형 찬성하는 사람들도 정치범에 대한 사형을 열렬히 찬성하는 사람은 없구요.
강간,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사형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죠.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 제도는 얼마든지 오용될 수 있으니까 문제인 것이죠. 민청학련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박정희는 죄없는 이들을 대법원 상고 기각 판결 이후 18시간만에 사형에 처했습니다. 정권은 언제나 사형수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는 않습니다.
ebs에서 소개되기도한 유명한 흑인 사형수 [스탠리 윌리엄즈]가 좋은 예가 될 수 있겠군요. 스탠리 윌리엄즈는 젊은 시절에 무장 강도를 저질러 무고한 시민 4명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사형을 당하기 까지 25년 동안 무려 여섯번이나 노벨상 후보에 올랐죠. 이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결정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말죠.
사형제를 단순히 악에 대한 분노만으로 판단하는 건 현실에 대한 적확한 이해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사형제가 가지고 있는 층위는 매우 다양하고 이건 죄인을 죽이냐 마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권력이 개입할 수 있는 개인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 인권은 어느 선까지 보장되어야 하는가, 권력에 의한 사형제 오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오류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주는 것이 옳은가. 이러한 다양한 양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저 감정의 흐름에 실려갈 뿐입니다. 중세를 다룬 영화에 자주 나오는 사형수를 향해 과일을 던지는 사람들과 같아지는 거죠.
http://blog.naver.com/brookeeze?Redirect=Log&logNo=40020432345
http://blog.naver.com/hooniel?Redirect=Log&logNo=70008810269
스탠리 투키 윌리엄스의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좀 알고들 이야기하시길.
http://www.iza.ne.jp/news/newsarticle/event/139547/
이번 사건에 관련된 가장 골때리는 기사.
모든 종류의 처벌은 권력에 의해서 오용될 수 있습니다. 정권이 정치적 의도로 사람을 사형시킬 수도 있고, 감옥에 가둘 수도 있으며, 재산을 압류하는 방식으로 괴롭힐 수도 있죠. 정권이 오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폐지한다면 대체 무슨 처벌이 남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징역도 정권에 의해서 얼마든지 오용될 수 있는데 왜 징역은 반대하지 않습니까?
어떤 종류의 처벌이 합당한가는 국가가 권력을 정상적으로 행사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부가 전복된 상황에서도 과연 현재의 법률이 현재의 방식 그대로 적용될까요? 지금 사형제도 없고 삼청교육대도 없으면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도 사형제도 없고 삼청교육대도 없을까요? 아니잖습니까. 꼭 쿠데타가 아니더라도 권력자가 정적들을 멋대로 사형시킬 수 있는 상황이라면 설령 그 전에 사형제를 없앴다고 해도 간단히 되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지금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감정에 매몰되기보다 현재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사형제도는 찬성하는 쪽입니다.
흉악범들이 다시 풀려났을때 재범하는 확률이 너무 높아서
사건 발생시 수사에도 가장 먼저 동종의 범죄를 저질렀던 전과자를 먼저 검색합니다.
만약 정말로 개과천선 해서 양심적으로 살아간다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같은 범죄를 또 저지르게 되면...
그냥 무고하게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대체 누구탓으로 비극을 당한게 되는 겁니까?
백배 확대 해석해서 저는 그걸 풀어준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제가 궁금한게 있는데
사형제도보다 더 가혹한 벌이 있습니까?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의 형벌은 단지 죽음뿐입니다.
법률이 '보복'을 긍정한다면, 최대 형벌은 사형이 아니라 피해자 가족에게 생사여탈권을 주는 것이겠죠. 사형이라는 것은 보복이라는 감정적인 행위를 최대한 제도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입니다. 결국 보복이 가지는 극단성을 거세하는 것이 목표죠. 법률은 절대로 보복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소수를 외부인화, 타자화하여 다수를 보호할 뿐입니다.
그리고 징역과 사형은 완전히 성격이 다른 형벌입니다. 징역은 제한이고 사형은 박탈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지는 아무리 써도 짧게 못쓰겠으니, 관련 서적이나 자료를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면 되겠습니다.
감옥 밖에서 사람을 죽이면 죄가 되고, 감옥 안에서 (사형수가) 사람을 죽이면 죄가 되지 않는 것이
모순이라면 모순이겠죠.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게 참으로 애매한 문제죠.
전 개인적으로 그냥 무기징역자들이 저희가 낸 세금으로 밥을 먹는게 아깝네요.
사형제도가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된다면 중국처럼 스타디움에서 공개총살을 해야죠. 근데 중국 별로 좋은 소리 못 듣는답니다. 왜일 것 같나요?
감성적인 사람들 진짜 많네. 국가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 외에 합법적으로 생명을 국민(범죄자)도 국민의 삶을 간단한 버튼으로 없애는게 사형입니다. 그렇게 사형이 좋다면 왜 중국의 사형제도는 옹호하지 않느가요? 그게 정말 인도적인 방법인가요? 사형제를 하지 않더라도 무기징역이라는 제도도 있습니다. 무기징역은 사회와 격리시키는게 아닌가요 묻고 싶군요. 그리고 법은 범죄자를 보복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치면 함무라비 법전이 최고의 법전인가요?
"국가가 합법적으로 사람을 수십년까지 잡아가둠으로써 국민의 삶을 간단히 파괴하는 것이 바로 징역입니다. 그렇게 징역이 좋다면 왜 김정일이나 피노체트의 정치범 수용소는 옹호하지 않는가요? 그게 정말 인도적인 방법인가요? 징역제를 시행하지 않더라도 벌금이라는 제도도 있습니다. 벌금은 그 사람에게 처벌을 가하는게 아닌가 묻고 싶군요. 그리고 법은 범죄자를 보복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글을 보고 털끝만큼이라도 징역제를 폐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위에 쓰신 글도 그만큼의 설득력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어떨까요.
무기징역은 사회와 완전히 격리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 이런저런 이유로 형량이 계속 줄어듭니다. 무기징역처럼 오래 들어가 있는 경우라면 거의 100% 줄어든다고 봐도 됩니다. 그래서 다시 사회로 나오게 됩니다. 사형제의 대안으로 '감형 없는 종신형'이 거론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이름이 '무기' 징역이라고 정말 무한대로 지속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함무라비 법전 말인데요, 함무라비 법전에서 말하는 것은 "눈에는 반드시 눈을 받아내야 한다"가 아니라 "눈에는 오로지 눈만을 받아낼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재보복도 금지한다" 라는 것입니다. 복수의 원칙이라기보다 복수를 제한하고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원칙인 것이지요.
"그렇게 치면 아예 법체계를 없애라고 하십쇼." 그게 바로 dd 님의 논리라는 겁니다. 자기 주장과 남의 주장 정도는 구별하셔야죠.
"내가 언제 법체계를 없애라고 했느냐" 는 주장이 따라나올 것 같습니다만, 그게 dd님 논리의 결론이라는 겁니다. 모든 법체계를 부정하는 논리를 펴면서 단지 사형제에만 이 논리를 적용하겠다는 술책이 과연 통할 것 같습니까? 모든 법체계를 날려먹는데 동의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dd 님의 논리에 동의할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자기 입장 정도는 자기가 스스로 정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주장 중에는 지금의 무기징역으로 충분하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종신형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dd 님처럼 종신형이건 무기징역이건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던지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함무라비 법전 이야기는 함무라비 법전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 같아서 붙였습니다. 사형제가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방법이라는 분위기가 풍겼나요? 어떤 종류의 처벌이건 개인의 보복이 아닌 국가의 처벌인 이상 그런 악순환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감성적인 사람들 진짜 많네." 라고 하신 분이 이렇게 몸소 '감성적인 사람들' 숫자를 하나 늘려주시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징역은 개인의 삶을 파괴합니다. 법률을 어겼으니깐요. 그렇지만 삶의 파괴하는 것 하고 삶의 박탈하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죽음을 국가가 선도하는 것은 국가가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입니다.태극기가 태극기를 쏜다고 생각하십쇼. 징역은 합당하지만 사형제는 그 이상 것을 한다고 봅니다. 이 것으로 제한해야지 다른 것 이상으로 가면 법률체계는 왜 있습니까? 함무라비 법전에 관한 지식이 없지만 지금 사형제를 옹호하는 논리가 지금 이성적입니까? 지금 사형제를 옹호하는 것은 복수의 논리에 따른 것 입니다. 위에 포스팅된 글도 복수의 논리에 따른 것이라 문제되고 있습니다.
으 사형제 떡밥.
참고로 사회계약적인 이론적인 문제에서 있어서 사형제는 부당합니다. 이유는 형법학의 아버지인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같은 책을 읽으시면 알 수 있을 것이고...뭐 여하튼 사형제도의 불합리성 때문에 유럽쪽은 대부분 사형제가 없지요.
한국에서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건 악질적인 범죄 예방이나 감정론적인 문제에 있는 것 같습니다만...
어쨌거나 사회계약의 시작은 개인의 자유의 일부를 양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고, 만약 자연상태의 인간이라면 목숨을 내어주는 사회계약을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는 절대적으로 폐지쪽이 정의롭겠죠.
물론 사형제도가 없어진다면 그에 대한 대안이 충분히 검토되어야 겠습니다만...
모든 죄가 죽음으로 갚아진다는 논리도 어불성설이고...
사형제는 일종의 총기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국가가 가질수있는 총기입니다.
사형제를 주는건 국가에게 총기소지 자유를 허가하는거지요.
게다가 생각보다 국가가 항상 잘하는 것만은 아니라는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감정보다는 논리가 우선입니다. 인간의 판단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남겨두어야 하지요.
인간은 '합리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수가 있는걸까요. 아니면 다들 인터넷 게임만 하고
몹만 미친듯이 잡아서 사람 하나 죽는거 신경 안쓰는 오덕들만 모이신건가.
사람은 리스폰 안 돼요.
극단적인 범죄가 안 일어나게 하려면 경찰을 더 고용하고 사회 불안 요소를 없애고
정신병리적 행태가 안 일어나도록 구조를 정비하는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디서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버릇들을 배우신 건가요.
내가 인간이 이성적일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과연 악인을 하나 죽이고
정의가 세워질수 있다고 봅니까? 이것이 더 극단적인 비이성이 아닐까요?
이러니까 게시판에
노무현 때문이네 이명박 때문이네 하는글만
주구장창 달리지...
가끔 한국인들은 너무 단순한 이야기로 모든걸
해결하려고 하는거 같습니다.
아직도 '때려잡자 김일성'시대에 머물러 있는가보죠.
사람은 리스폰이 안되죠. 그들이(살인자) 이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요..
개인적으로 그렇습니다. 사형제도 찬성하지는 않습니다만,
범죄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그들 손에 죽은 사람들의 인권은 왜 무시당하고있는지( ..)
국가가 죽이는건 사람이고, 그들이 죽인건 사람이 아닙니까?
사형제 찬성론자는 "정말 죽여야할 인간이라면 죽여야 마땅하다" 고
사형제 반대론자는 " 악용될수 있다. 혹은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심판하느냐.." 라는 쪽인데
유아 성폭행자라던가 발발이 같은 무차별 성폭행, 불특정다수를 향한 쾌락살인 등의
모두가 인정할수 있는 죽어 마땅한놈들 같은 경우는 사형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분들 자체도 인간이기에, 인권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분이 계신다면 분명, 현대 사회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으므로 논쟁거리가 되어야 하지만...
뭐 하여튼 저같은 경우는 제 가족이 살해당한후 시간당하고, 제 자식이 죽음을 당한다면, 이유도 제잘못 혹은 제 가족의 잘못이 아니라 그저 쾌락을 위한, 이유없음 이라면 제가 죽여버리고 싶을테니...
아.. 어려운 문제죠?
전의 부시글에 이어 비슷한 덧글이 쫘악 올라오겠네요 기대합니다ㅋ
사형제 반대론자의 주장과 찬성론자의 주장 다 알고 있습니다만 전 사형제 찬성론자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감정으로 해답을 먼저 내놓은 후->이론으로 뒷받침하는게 아닐까해요.
아 그리고 궁금한게 있는데 수도검침을 핑계로 집에 침입, 23세의 새댁을 강간하려다 그녀가 강하게 저항하자 목을 졸라 죽인 후 사체간음, 이후 울부짖은 11개월 된 갓난아기를 땅바닥에 몇 차례나 내리쳐 살해, 이후 돈을 훔쳐 달아난 사람도 사형제 폐지론자분들 말씀으로 살려두어야 하는거군요. 네.. 저런 사람들도 가해자의 인권을 위해 살려두어야 하는거겠죠?
사형을 반대하는 이유가
1. 죽으면 되돌이킬 수 없다.
2.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다.
정도로 생각됩니다. 맞나요?
혹시 추격자란 영화 보셨습니까? 연쇄살인에 대한 사건 보고서 같은거 보셨나요?
유영철같이 죄가 확실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경우엔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대안을 알려주세요.
감옥에 있다고 해서 교화되지 않습니다. 교도소에서 나와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감옥은 대안이 되지 못하니 무작정 안된다고만 하지 말고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쓰면서 반대하세요.
그리고 자신의 아이, 아내,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들중 하나라도 누군가에게 악의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도 복수를 말하지 않을 분만 사형 반대론을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뭔... 저는 일단은 사형제는 집행은 안하더라도 놔 두기는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자신의 아이, 아내,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들중 하나라도 누군가에게 악의로 사법살인(그러니까 예전에 박통이 했던짓이나, 히틀러암살사건을 기도했던 사람들을 재판받자마자 보내버린 그런일)을 당했을때도 사형제를 주장하실 분만 사형제를 찬성해야 하나요-_-;
여기엔 안계시겠지만, 사형반대 하시는 분중에 가족이 살해 당한 분도 계시긴 합니다. 그 분 말씀으론 지금와서 죽여봤자 아무것도 변하는게 없다라고 하시더군요. 가족이 살해당하고도 반대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하나요?
사형제 폐지하나요?
어떻게 보면 사형제 찬성 하다가도 내 가족이 살해당했을때 그 분 처럼 용서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죠.
그렇게 따지면 가족이 살해 당하지 않은 사람은 사형제 폐지는 물론 찬성도 주장하면 안되는 겁니까?
물론 그런 경우도 생각해 봐라는 뭔가를 논의할때 당연히 거쳐야 하는 일이겠지만, 말씀하신 건 인정하기 어렵네요.
초등학생 싸움이 아니잖습니까-_-;
시간도 리스폰 안됩니다. 위의 몇몇 분들은 지금 잡아다가 80세쯤 되어서 풀어줘도,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 하실 분들 같군요. 누가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지 좀 생각해보죠. 뭐든 되지만 목숨만은 안된다라는 근거 자체가 극히 감성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지.
누가 단순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절대 목숨만은 안된다라는 도그마에 빠져서 '목숨만은 안돼요'를 반복하는 게 단순한 건지 심오한 건지...
근데 징역도 사실 교화에 효과가 없다죠? 징역형 계속해야 할까요? 그냥 벌금형만 모두 때리죠? 돈 많은 재벌 만만세~
간만에 마지스레.
딱 잘라 말씀드리자면, 근대 이후의 국가형벌권은 절대 피해자를 구제(혹은 복수)하려는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근대국민국가에서는 사적복수를 막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복수심을 국가의 형벌을 통해 해소한다는 사실적인 효과가 있긴 합니다. 허나, 이것은 간접적으로 발생하게 된 '결과'일 뿐이지, 결코 형벌의 법이론적 목적이 '복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피해자 구제가 형벌을 논하는 자리에 끼게 된다면 자칫 피해자에게 보상할 능력이 충분한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줄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피해자가 범죄로 인해 받은 정신적, 물리적 피해에 대해 국가가 보호, 보상해줄 의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구제는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논의될 문제이지 결코 형법과 연관되어서는 안 됩니다.
형벌은 어디까지나 범죄자가 저지른 죄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루게 하기 위한 사회적 도구일 뿐, 그 외의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되선 안 됩니다. 따라서 사형 찬반논쟁에 대해서도 어디까지나 '과연 사형은 죄에 대한 판결로 합당한 것인가?'로만 논의되어야 옳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범죄자의 인권도 지켜주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명확하게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고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물론 이 질문에 단순히 Yes/No 로 대답하라고 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히 Yes 죠. 만약 법으로 정해진 처벌 이외의 인권 침해도 상관없느냐고 한다면 그 답은 당연히 인권 침해는 안된다이며, 이 부분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예컨대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인 사람이라고 해도 굶겨죽인다거나 배를 갈라서 장기를 꺼낸다거나 하는 건 당연히 안 됩니다. 사형수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런 극악무도한 놈은 내 손으로 죽여주고 싶다" 고 말하는 사람이라도, "악당은 피해자 손으로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옳은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법으로 정해진 처벌 자체에서도 인권 침해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입니다. 처벌의 경우에 기본적으로 인권 침해는 불가피하기 때문에, 전혀 인권 침해가 없어야 한다는 건 무리한 요구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잡아 가두고 고생시키는 것은 가혹한 인권 침해이며, 단순히 그 재산을 몰수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생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사실상 벌금은 그렇게 큰 액수가 나오지는 않기는 합니다만.) 오히려 아무런 인권 침해가 없이, 죄수가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건 처벌이 아니라 휴가라고 부르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벌이므로 얼마든지 인권 침해를 해도 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과연 어떤 형벌은 괜찮고 어떤 형벌은 안 되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꼭 인권 침해가 더 심하다고 안 된다는 것도 아니거든요.
실제로 대표적인 문제가 된 것이 '태형'입니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문명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야만적인 형벌입니다. 하지만 싱가폴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미국인이 싱가폴에서 태형을 받게 되어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왜 태형이 안 되는지, 혹은 왜 괜찮은지를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단지 '야만적이다', '주권침해다'라는 변죽을 울리는 이야기들만이 오고갔지요.
유렵이나 미국에서는 국가가 국민에게 직접 고통을 주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쪽에서는 애들 교육시킬 때도 직접 폭행하는 것에는 우리보다 부정적이고, 처벌방에 가두는 등의 방법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긍정적입니다.) 사형을 집행할 때도 최대한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는 방식을 택하죠.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체계를 받아들였고, 그래서 '태형' 같은 처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람을 잡아가두는 것보다 왜 나쁘냐고 묻는다면 이유를 말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도입해도 괜찮으냐라고 묻는다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죠.
사형제 논의도 마찬가지로 항상 걷돌게 됩니다. 일단 양 쪽에 뭔가 이유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각각 상대방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논리를 공격하는 것은 아주 쉬울 수밖에 없죠. 사실상 빈틈없는 논리를 세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형제 폐지론자들이 상대방을 감정적이네 뭐네 하며 비난하는 건 매우 부당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심해 보입니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형은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형제를 폐지해야 하는가" 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절반에는 못 미치지만) 그럭저럭 숫자가 됩니다. 하지만 유영철이 저지른 짓거리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거나, 이번의 예와 같은 극악무도한 사례를 보여주면서 "이런 자들도 결코 사형시켜서는 안 되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극소수의 골수 사형제 폐지론자들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추상적인 제도로서의 사형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비교적 있는 편이자만(그래도 찬성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실제로 사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사형 판결(사실 집행은 안 되고 있기는 합니다)에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사형시켜서는 안 되는가'라고 '결코'라는 말을 붙인 것이 마음에 안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라면 이번 본문 같은 사건이라고 해도 반드시 사형 판결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으며, 안 나올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어쨌든 초범(...인 것 같군요)이고 나이도 어립니다.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고 피해자 가족과 합의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취하는 정도만 하면 아마 사형시키기가 좀 어려울 겁니다. 사형제가 있다고 극악무도한 자들이 전부 사형당하는 건 아니죠. 그 중에서도 특별하게 심각한 자들만 일부 사형 판결이 나올 뿐입니다. 미국 영화처럼 그렇게 쉽게 사형시키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하나 예를 들어서, 사형제 반대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숫자가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고등법원의 사형 판결도 그들의 인권을 무시한 부당한 것이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꼭 죽이자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은 사형제가 있으니까..." 라는 식으로 대답을 망설입니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숫자가 전두환, 노태우를 매우 증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유영철이나 이번 사례의 살인범같은 자들을 그 이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정도는 고려해야 스스로 '이성적'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형이 단순히 그들의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입니다.
미묘합니다. -_-a;;
딱히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사형제도라는 게 미묘한 문제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확실힌 말씀대로 현재의 형법은 사회적 동의 아래 범죄자에 대한 일정 수준의 인권침해(이동의 자유, 자기 결정의 자유 등)를 용인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형제도 찬반은 이런 사회적 동의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인권의 침해라고 해도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과 생존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결과적으로 이건 끊임없이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긴 합니다만, 미묘한 사항인만큼 앞으로도 이것에 대한 확실한 '정의(定義)'가 내려지긴 힘들 것 같습니다. 어느 쪽 의견이 전적으로 맞다, 틀리다고 할 수도 없고, 중립적 의견이 나오기도 힘든 사항이니까요.
다만, 앞서도 말했듯 형법을 복수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식의 발언은 다소 자제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법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제도적 장치일 뿐이지, 그 이외의 목적으로 혼용되어 사용되는 것은 법의 평등성과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분명 지향되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여기서 논리적으로 떠들어도..
자기 가족이 위 같이 당하거나.. 차마 위처럼 안당하고 범죄의 희생자가 되어도..
"범죄자의 인권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논리적으로 떠들 사람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물론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감정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결과가 좋지 않기에 법이 있는 것이지만,
"이성적"인 척 하는 모습들도 보기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네, 여러분 잘났습니다.
제 절친한 친구는 인혁당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형집행을 초고속으로 처리해 주는 바람에
작은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사형 찬성론자들에게 되묻죠.
당신들은 사형 반대론자들에게 '너네 친척이 유영철에게 죽어 보라. 사형이야기 안 나오나'라고 하는데
그럼 당신들 친척이 억울하게 사형당해보라구요.
어차피 연쇄살인마에게 죽나 억울하게 사형당하거나 확률적으로 드물기는 마찬가지죠.
당신들이 악인을 처벌할수 있는 힘이있다고 믿지 말고
악인이 살인을 해서, 남의 생명을 뺏어서 나쁜거지
그와 같은 힘을 우리가 똑같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무슨 야가미 라이토입니까?
왜 그렇게 "나는 국가가 나를 잡아가둬도 괜찮다" 라는둥 하는 식의, 다른 사람들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시나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죠. 자기 트라우마를 남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사이머넌 님이 무슨 상처를 가지고 있건 사이머넌 님을 어르고 달래주기 위해서 제도를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사형제 때문에 누구를 잃었느니 운운해도, 세상에는 사형제 때문에 누군가를 잃은 사람보다는 흉악범 때문에 누군가를 잃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정도는 생각하실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님의 말씀에 전체적으로 동의는 합니다만...
마지막 말씀은 살짝... 거시기하군요. -_-a;;
설령 흉악범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해도 사형제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는 이상 이러한 논거는 위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제가 잘못 이해했다면 죄송합니다
예를 들자면 영화 같은 곳에서 흔히 나오는 히어로의 딜레마죠.
<눈앞에 있는 한 명의 사람을 구하면 잠시 후 열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당신은 누굴 구해야 할 것인가?>
뭐, 영화에선 결과적으로 양 쪽 모두를 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여하튼...
절대 다수의 절대 행복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열 명을 구하는 게 맞겠습니다만, 그 한명의 생명이 다른 열 명보다 가볍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생명을 무게나 가치로 판별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한 사항이 아닐까 싶습니다.(but 이 이상 문제가 복잡해지는 건 피하고 싶으니 여기에 대한 논의는 되도록 피하고 싶군요^^이렇게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사항을 논거로 말씀하시는 건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이것은 님의 댓글 중 이 부분이 이상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죠. 자기 트라우마를 남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사이머넌 님이 무슨 상처를 가지고 있건 사이머넌 님을 어르고 달래주기 위해서 제도를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흉악범에 의해 죽임을 당했건, 죄 없이 오명을 써서 죽임을 당했건 양 쪽 다 남에 의한 억울한 죽음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이것은님께서는 사형제 찬성론에 뒷받침이 될 만한 '흉악범에 의한 죽음'은 당연히 중요한 문제이고 후자는 <트라우마>일 뿐이니 엄살 떨지 말라고 가볍게 말하시는군요. 이것은님처럼 얘기하자면, 살인자에게 죽음을 당한 일도 개인의 트라우마이니 감히 너의 트라우마 따위로 사회 제도를 결정할 생각 하지 말라고 똑같이 우길 수 있겠네요.
저라면 생사의 문제만큼 큰 일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그렇게 쉽게 왈가왈부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것은님께는 그것이 참 쉽네요.
그렇게 다른 사람의 목숨 문제를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분이, 살인자들은 사람 목숨을 파리 같이 여기므로 엄격한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재미있습니다. 이것은님, 한번 생각해보세요. 본인이 정말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기에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본인의 정의로움을 더 잘 드러내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찬성하는 것인지.. 이것은님이 스스로를 참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만족해하라고 사회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 정말 본인이 언제나 옳고 정의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먼저 사이머넌님의 인생을(비록 본인의 친척의 일은 아니었지만)함부로 말한 것을 사과하시는 편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단히 남의 삶을 판단하는 조급함으로 과연 바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지를 반성하는 시간부터 가지심이 옳을 듯 합니다. 길을 찾을 때도 서두르면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면, 얼마나 더 심사숙고함이 필요할지요.
당연히 '흉악범에 의한 죽음'과 '사형제에 의한 죽음'은 모두 고려해야 하죠. 그리고 어느 쪽이건 자기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주장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저 남편의 말은 얼마나 논리에 정연합니까? 그 전제나 결론에 대해 찬성하라는 것은 아니지만(저도 사실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저 발언은 사형제보다는 오히려 판례의 적용에 대한 것이 핵심입니다.), 최소한 주장으로서 번듯한 가치가 있죠. 사이머넌 님도 저런 식으로 주장을 펼쳤다면 충분히 설득력과 타당성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이머넌 님의 글은 그런 '주장'이 아니죠. 단지 자기 감정을 이유로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떼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감정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있는 이상, 내가 이렇게 느낀다는 감정은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건 본인 책임입니다. 본인이 무슨 경험이 있다고 아무 주장이나 생각없이 늘어놓으면서 동의해 달라고 하는 건 억지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 감정을 이유로 무조건 자기 말을 들어 줘야 한다고 하면 반대쪽에 있는 그런 감정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의 이야기입니다. 들어달라고 하고 싶으면 자기 쪽 이야기가 일반인들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야지, 제대로 된 주장도 없이 "난 사람을 잡아가두는 정도는 얼마든지 괜찮다고 생각한다" "너희들 참 잘났네" "너희들이 야가미 라이토냐" 식의 억지를 부리고 있는데 이걸 받아달라고요?
한 마디로 요약해서, 남의 상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어렵지만, 계속 억지를 부리면서 자기의 상처를 이유로 정당화하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왈가왈부할 수 있습니다. ㅁㄴㅇㄹ 님이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신다면, 김두한이 사회주의자 때려잡고 다닌 것이나 박근혜가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이유로 큰소리치는 것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할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 친척이 흉악범에게 죽었다고 생각해 보시지요" 이건 가정입니다. 하지만 "당신 친척도 흉악범에게 한 번 죽어보시지요." 이건 저주입니다. 그런데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그런 종류의 저주를 참 쉽게 늘어놓더군요. 그것도 "당신이 직접 한 번 사형당해 보시지요."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예의니 정의로움이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할 만한 이야기들은 아닐 겁니다.
결국 단순화 시키면
'죄 지은자에게 그에 맞는 처벌을 하지 못하는 것' 과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부당한(또는 과도한) 처벌을 받는것'
둘 중에 어느쪽이 더 나쁘냐에 대한 시각차이가 아닐까요.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이 두 경우를 완전히 분리해 내는것이 불가능해 졌다는 겁니다. 사람마다, 사회마다 각 죄에 해당하는 적합한 처벌의 정도가 모두 다르니까요. 저는 이 글에 나와있는 피해자 남편의 주장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살인자에 대한 좀더 강력한 일률적인 법집행을 요구한다면 더 공감이 가겠으나, 그때그때 사안에 맞춰서 유연한 법의 판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는 정말로 강자에게 악용될 소지가 너무 높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법은 악용될 소지가 있다.' 는 반론에는 이미 위에서 말씀해주셨다시피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그렇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고밖에 할수가 없어요. 명문화된 법은 인간 개개인의 정의를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법은 그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를 위해 세워진 미봉책이며 절대로 완벽할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의 어느 법이나 선의의 피해자나 악용자가 있어 왔죠. 단지 그때그때 어느쪽이 더 수가 많은가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질 뿐입니다.
때문에 요즘의 대한민국같이 흉악범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시기에 사형제도같은 강력한 처벌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고 봅니다. 또한 419나 군부독재시절 이루어졌던 수많은 악용사례를 겪었거나, 기억하고 있는 세대라면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가깝고 많게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결국 제가 사형제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갖게된 것은 위에 나와있는 '사형집행자' 의 인격에 대한 부분과 사형제 자체를 악용하는 것이 아닌 사형제도를 일종의 사회적 눈가림으로 이용하는 경우 때문입니다. 모든 범죄에는 원인이 있고, 심지어 동기없이 이루어지는 사이코패스들의 범죄도 '사이코패스가 만들어진 원인' 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국가나 사회는 이미 이루어진 범죄에 대해서 재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하고 예방할 의무또한 중요하지요. 하지만 전자가 후자에 비해 훨씬 눈에 잘보이며, 당장 뭘 하고 있다는 인식을 줄수 있습니다. 시간이나 비용도 더 적게들지요. 때문에 무능하고 근시안적인 사회일수록 당장 눈앞의 범죄자를 어떻게 단죄하느냐를 전시행정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저는 사형제가 유지된다 하더라도, 그 사형의 집행여부나 처발되는 범죄자에 대한 정보는 그 가족이나 피해자 가족들 정도에게만 공개되는게 사회를 위해 더 이로울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내가 직접 당한일이 아닌이상 이미 일어난 일을 필요이상으로 자세히 알아서 공포에 떠는것 보다는 그런일을 안당하기 위해 조심하고 대비하는게 중요하죠. 그리고 치안이나 법에 정말로 강력하게 요구해야 할것은 그부분이고요.
개인적으로 저는 사형제반대론자입니다만 제가 사형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지금껏 위에서 논의된 반대론자분들과는 약간 다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사형제야말로 살인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관대한 처벌형태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징역이라는것이 살인자에게 관대한 처벌로 자칫 받아들여지기 쉽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명목상으로는 현재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고 그에따라 사형수들은 언제 간수가 그들을 사형대로 데려갈지 모르는 현실에 놓인채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악의 스트레스를 계속해서 받고있습니다.(물론 대부분 이러한 부분은 영화와같은 외부매체에의해서만 보여지지만 실제로 이와 관련된 작품들 대다수가 사형수들에대한 리포트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나 일리 있는 스토리라 할 수 있죠.)
사형은 그 자체로 죽이고 쌩입니다. 솔직히 물어봅시다. 사형수가 겪는 고통이 사형을 기다릴 때 제일 클까요 아니면 사형당하기 바로 직전에 제일 클까요? 대다수의 사람이 벗어날수 없는 현실에서는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인다는것을 생각한다면 사형대에 사람을 올리는것은 사형수에게 있어서 가장 관대한 형벌일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과정은 완전한 절망속에 일말의 희망을 보여줌으로써 사형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형..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위엣분들이 하신 말씀들 전부 맞습니다. 사형이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이고 돌이킬 수 없는 형 집행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관점에서 보자면 무기징역보다 더 자비로운 형일 수도 있지요. 현재의 무기징역은 약 10년정도를 모범수로 보내면 가석방신청이 가능하도록 하지만 가석방없는 무기징역을 입법화 하여 경과하면 된다는 전제하에도 저는 사형에 대해 절대적으로 찬성합니다.
그 이유는 사형이라는 제도가 사라진다면 '법률로 보호받는 불사신'이라는 괴물이 탄생해 버립니다.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더이상 사회로 복귀할 수 없음을 빌미로 교도소내에서 폭동, 반란등의 행위를 주도할 수 있고 아주 극단적인 예이지만 효도르를 감옥에 집어 넣을때 방범봉으로 제압가능하리라 생각치 않습니다. 효도르이상의 격투능력을 가진자가 교도관의 눈을 찌르는등의 행위로 실명케 한다 해도 법률상 그는 법정최고형인 가석방없는 무기징역만을 받을 뿐입니다.
여타 이유등이 있지만 법률로 보호받는 불사신의 탄생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형제에 딱히 입장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왜 "내가 내고 있는 혈세로 먹고 평생 사는 흉악범" 에 대한 생각은 아무도 안하시는지 ^^;;
형벌의 목적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 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안보이는군요.
크게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응보' 와 '교화'
중세, 근대의 법질서는 [모든 사람은 '자유, 평등, 이성, 이기' 적이다] 라는 획일적 인간상을 모델로 하고 있었고, 인권의 중요성이 지금만큼 부각되지 않았기에 형벌의 초점은 '응보' 쪽에 맞춰졌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에 들어와선 사정이 달라졌지요. 모든 사람이 균일하게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이기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습니다. 인권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권은 범죄자에게도 인정되어야 함이 마땅하지요. 덕분에 현대에 들어 형벌의 목적은 '교화' (가석방, 보호관찰, 사회봉사명령 등등) 로 그 무게중심이 이동했습니다.
'교화' 의 맥락에서 본다면, 사형제는 그리 유쾌한 제도가 되지 못합니다. '응보중의 응보' 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덕분에 사형제의 존재 가치가 점점 떨어져 가는듯 했으나, 사안과 같은 정신병자들의 등장과 효율성 측면 때문에 '교화' 에만 올인하기도 애매해진 상황이 되버렸습니다.
이건 뭐 효율성도 입증이 잘 안되는데다, 효율성 의심스런 제도마저 안먹히는 '괴물' 들이 자꾸 등장을 하니 말이죠.
결국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갈지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위와 같은 '괴물' 들을 '생산' 해내는 체재로 발전한다면, 형벌의 목적은 '응보'에 무게중심이 실릴것이고, 사형의 존재가치는 그 중요성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괴물' 들이 극히 적은 확률로 '발생' 하는 사회가 형성된다면, 사형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할지는 의문입니다.
* 댓글 중 '사람에게 살인할 권리가 있는가?' 라는 이야기가 보이던데, 태고적엔 있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선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거 같은데...
'복수 vs 교화' 쪽으로 자꾸 흘러가는 흐름을 보니 아무래도 이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군요.
형법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대충 3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응보론, (적극적) 일반예방론, 특별예방형론이 그것입니다. 응보론은 '복수'와 관계가 있지만 '피해자가 하고 싶어하는 복수'가 아니라 죄 자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특별예방형론은 보통 이야기하는 '교화'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각 범죄자를 재교육해서 사회에 내보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예방론은 범죄의 '예방'에 의한 법익의 보호에 촛점을 맞추고 있죠.
형법을 결정할 때 저 세 가지 이론에 따른 측면들을 모두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셋 중 어느 쪽이 맞느냐고 하는 건 좀 곤란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론이 영향력이 강해지고 약해지는가는 말할 수 있죠. 현재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은 적극적 일반예방론입니다. (게다가 장기적으로는 응보론이 약해져 왔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의 흐름을 보면 응보론의 영향력이 다시 강해지고 있는 듯하며 특별예방형론은 오히려 적극적 일반예방론에 대체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영향력이 있는 이론을 빼놓고 "복수 vs 교화'로만 제한한다고 하면 제대로 된 논의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인권'을 이야기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측면의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일반예방론' 쪽이기 때문입니다. 응보론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죠. 따라서 "피해자의 인권? 결국 복수하자는 것 아냐?" 같은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물론 응보론을 공격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교화가 핵심이 되지도 않으며, 사형제 하나를 이유로 이론 하나를 완전히 폐기처분하자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게다가 교화에만 너무 촛점을 맞춘 나머지 응보와 일반예방의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확실하게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결과가 됩니다.
응보론과 일반예방론을 긍정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론적으로 보면 사형은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인 결론이다" 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미국 범죄학 전문가 로버트 K 레슬러씨가 쓴 책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말미에 나오는 얘기인데...
미국은 사형시키는데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든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 예산으로 범죄심리학 연구센터를 지어 살인자들의 심리를 연구한다면 범죄를 줄일수 있을거란 말을 하는데 제법 괜찮은 의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형폐지는 반대하지만 이런식으로 재발방지에 노력을 쏟는것도 괜찮을 듯 싶네요.
점점 단순범죄 보다는 심리적인 원인을 가진 범죄가 늘어나니까요. 총기난사같은...
840
문득 생각났는데, 아기들이 먹는 우유병의 젖꼭지 부분은 실제 유두를 얼마나 재현했다고 봐야할까요?
841
>>840
그렇게 큰 유두를 가진 여자는 없어.
그저 우유병의 주둥이는 아기가 마시기 쉽게 디자인 되었을 뿐.
게다가 실제 모유는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만큼 아무래도 우유병의 실제 가슴 재현도는
높지 않다고 본다.
850
>>841
그렇네요
더이상 우유병으로 우유를 먹는 건 그만둬야겠어요
갓 태어난 아기는 며칠동안 산모랑 떨어져서 신생아실에 있는데,
그 때 간호사들이 신생아에게 분유나 (병실의 엄마가 짜서 보낸)모유를 먹여요.
근데 그걸 작은 컵을 이용해 먹이기도 한다는 거 아세요?
cup-feeding이라고 하는데, 산모가 모유수유를 할 계획이 있을 때는 컵을 써요.
섣불리 빨아먹기 쉬운 bottle-feeding을 시키면
아기가 나중에 엄마 젖꼭지에 적응을 못 하거든요.
여담이지만 산모들이 모유를 짜서 보내는 팩에 아기에게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신생아는 글자를 못 읽는데wwww산모들 귀여워ww
고등학교때 막 아이 낳은 여선생이 있었는데, 모유 보온병이 책상에 올려져 있어서 조금 설렜던 적이
있습니다
결단코 맛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성우 오치아이 유리카. 불쌍한 그녀.
블로그 개설. 처음에는 식사나 패션에 관한 화제로 평범하게 운영.
↓
2ch VIPPER들이 야겜 이야기나 화보집 이야기로 난동
↓
정신 붕괴
↓
블로그에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헛소리(암호같은 시)를 종종 쓴다
↓
일부 매니아들 사이에서 그 의미불명한 글들이 인기를 얻는다
↓
그 인기를 질투한 일부 여자 안티들이「내용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는 헛소리로 폼 잡지마」하며 난동
↓
정신 붕괴
↓
기분 전환을 위해 오프라인 모임을 열지만,「모임의 회비가 너무 비싸다」라며 욕을 수없이 먹는다
(회비 1000엔, 그 대가로 그녀가 직접 싼 샌드위치 제공의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음에도 무수히 욕을
먹는다)
↓
정신 붕괴
↓
그나마 믿고 있었던 기획사 사장에게 배신당한다
(성우 기획사 아트비전 사장이 몸을 요구, 거절. 그 대가로 회사에서 쫒겨남)
↓
정신 붕괴
↓
같은 성우업계의 성우들에게 비웃음 당함
↓
정신 붕괴
어느 분인가...했더니만- 투하트2의 코노미!!<br /> <br /> 투하투~관련 포스팅에서 누누히 적었다시피<br /> 마른 듯~하면서도 촉촉한 목소리가 참 맘에 들어서<br /> 코노미~코노미~코노미~를 외..
이런 인신공격성 글을 그대로 번역해서 가져오시다니 좀 의외군요;;
사실확인도 안된 루머들에다가 챤넬에서 까이는 오치아이 유리카 관련 글을 그냥 가져오시다니...
사견입니다만, 이런 글은 내리는게 좋을 듯 합니다 (__)
음, 글쎄요. 위 글이 인신공격성 글이라고는 결코 생각치 않습니다만...오히려 그 반대로 그녀에 대한
많은 루머와 공격이 조금 억울한 면이 있다고 알리는 글이라 생각이 드네요. 실제로 위의 코피페가
올려진 2ch 스레의 레스들 역시 그녀가 불쌍하다, 그녀가 앞으로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식의 동정
하는 레스나 축원의 레스들이 많았구요. 또 해당 사건에 대한 사전정보가 그다지 없는 전파만세의
이용자 분들 역시 그녀가 당한 일을 '불쌍하다'라고 생각하고 답글을 다신 분이 많은 것처럼 악의적인
인신공격성 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해당 사건의 언급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건 아닌가 싶네요.
아트비전 사건에 대해서. 루머라고 하시길래.
1. 2006년 10월, 오치아이 유리카가 아트비전을 나오면서 그 상황에 대한 암시를 한 시를 남김. 당시에는 그저 그런 이해하기 힘든 전파계 시라고 납득 함.
2. 아트비전 소속 성우들에게 수록이나 라디오 현장에서 왕따와 이지메를 당함. 실제 이지메 당하는 동화가 니코니코에 소개.
3. 2007년 4월, 성우시켜주겠다면서 16세 소녀와 외설행위한 아트비젼 사장이 체포. 루머 아님.
http://www.youtube.com/watch?v=AXh0D9M_m9c
4. 사장이 체포된 날, 유리시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
-------------
와(*^^*)
굉장히 좋은 소식이 당도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려요.
올해는 탈피하는 해가 되었음 좋겠어!!
힘내야지ㅇ(^_^)ㅇ
--------------
5. 과거에 썼던 그 전파계 시가 사장의 성상납 요구를 거부한 것을 암시했다고 판단.
6. 승리의 유리시. 프리생활 중 2007년 겐키 프로덕션으로.
7. 약소 소속사라서 이후 애니 출연 수가 준건지는 모르겠지만, 애니 성우만이 아니라 그라비아 아이돌, 가수, 라디오, 뮤지컬 등 다방면에서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 중.
사와시로 미유키의 디지캐럿 오디션 영상입니다.(1999년 당시 중2)
2:50초 쯤에 등장.
http://www.nicovideo.jp/watch/sm488361
1등은 물론 사나다 아사미씨였지만, 미유키치를 떨어뜨리기 아까웠던 주최측이
없던 특별상을 만들어서 줬다죠(그리고 푸치코로 기용)
뉴타입의 마을회장인가 하는 칼럼에서 봤는데
원래 leaf에서 만든 투하트 라는 게임에 아트비전이 참가를 안했었다가, 투하트가 대박나자
차기작 투하트2에 당시 아트비전에서 밀고있었던 성우 오치아이 유리카를 코노미로 투입.
그러나 정작 유명해진건 이토 시즈카씨와 나바타메 히토미씨.
오치아이씨의 현실은 개밥..... 정말 불쌍한 성우분ㅠㅠ
코노미 목소리의 여자(얼굴같은 것 상관없고) 샌드위.치를 직접 싸주는데 1000엔이 비싸다고?
난 10만원까지 쓸 생각있다. 대신 코노미 목소리로 내 이름 불러주고, 그걸 녹음할 수 있다면.
211
너희들은 세상에 너무 불만이 많아
밥을 먹을 수 있고, 한가로이 산책도 할 수 있고, 푹 잘 수도 있고···이게 행복이 아니면 뭔데?
213
>>211
· 피가 이어지지 않은 미인에다 개성적인 누나가 6명쯤 있어서 나를 귀려워해준다
· 매일 아침 잠을 깨우러와주는 착한 소꿉 여자친구가 있다
· 아이돌 수준으로 귀여운 같은 반 여자애랑 어릴 적 장래를 약속한 바 있다
· 귀찮게 잔소리하는 부모님은 안 계시지만 금전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다
· 매일매일 웃음이 흘러 넘칠 정도로 재미있다
· 매일매일 시시한 노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장래에도)
정도의 삶이 확보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전까지는...
그러다 누님이나 소꿉친구나 얀데레 한분 나오면 삽시간에 사망내지 배드엔딩... orz
모두 살길을 잘 찾아보아요 뿌우 'ㅅ'
행복이라는 것은 만족하는 것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이 어떻게 보든 거기에 본인이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행복. Q.E.D.
누구나 자기 생활에 불만을 가지기 때문에
인류는 발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더 나은 걸 추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더 좋은 걸 만들어냈다.
뭐.. 다들 이걸보고 비난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다들 이런 꿈 한번정도는 꾸어본 적 있지 않나요?
'귀찮게 잔소리하는 부모님은 안 계시지만 금전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다'
란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는군요.
과연 부모님이 그저 금전적인 문제만 해결해주시는 존재일까요...?
감사함을 모르는 자에겐 행복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음... 저런 경지에 일부 근접한 인간이 있습니다.
러브 히나 & 네기마 원작자, 아카마츠 켄.
(네기마의 아스나가 현재 아카마츠 부인이 모델이라는 설도 있고
http://pds7.egloos.com/pmf/200804/22/59/e0062759_480d2a4218663.jpg
어째서인지 리라쨩 하우스에서는 이런 놀이가 불가능하군요. 스페이스는 그렇다치고 ㄱ+한자+1 신공도 먹힐 때가 있고 안먹힐 때가 있으니. 흐어어엉.
리라 하우스에서 덧글 삭제된 사람은 내가 최초 일 것 같다
..................
......죄송합니다.;ㅁ;
..저 보자마자 코이즈미냐?! 라고 생각했.............................................
나만?
아아... 8살 차이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고...
딸이 대학가면 아들은 고작 초등학교 6학년...
고등학생이 이런소리하는것도 웃기겠지만
일단은 7살차 장녀라 걱정이...
후...이봐들.
초등학교 2학년생 딸 하나에 두살배기 아들하나면 한국의 아버지들에게는 지옥이라고.
쟤들을 대학보낼 때까지 최소한도 교육비에만 '평균' 6억원이 든단 말이다!!
거기에 집사느라 대출받은 빚에 생활비에....orz...
애들 나이를 보니 저 아저씨 대략 40대 초중반일텐데 그 나이에 최소 과장직급이라도 안 된다면 일상이 지옥이다. 전혀 부러워 할 일이 아냐. 애들이 중학생이 될 쯤에는 저 아버지의 헤어스탈은 대머리에 근접하게 될 걸...lllOTL...
과외하나 안하고 나쁘지 않은 대학 다니는 나는 뭥미? 대학학자금도 과외해서 대충 다 대는데...
우리집 워낙에 교육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으면서 남들 다 시키는 과외랑 학원도
안시켜줘서 내 생각엔 6억의 1/10 정도도 못쓰고 난 큰것 같은데.. ㄲㄲ 님이 돈쳐발르고 대학간거를 넘
일반화 시키지는 마시길.. 머 글케 돈을 아꼈으니 겨우 연대정도 갔다고 하면 할말이 없음 ;ㅁ;
이런 글 좀 올리지 마라....돈 아끼면서 맘에 드는 대학 갔다는 것까진 좋은데 남이 좋은 대학 가고 싶어 돈 들였다고 돈 처발랐다느니 어쨌다느니 온갖 잘난척....그러면서 학교 이름 들먹이지 마 좀. 이런 데 우리 학교 이름 나오는 거 자체가 싫고 학교 후배가 이런 식으로 까이는 것도 보기 싫고....
나도 나름 돈 안 들이고 연대 왔다고 생각하지만 남이 과외하고 학원다니며 연대 왔다고 돈 처발랐느니 이딴 소리 안 한다. 등록금도 본인이 번다니 기특하긴 하지만(나는 과외나 학원은 안 다녔어도 등록금은 부모님께 받고 있으니) 본인 기준으로 남을 함부로 멸시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덧. '남 까는 건 내맘이야 참견마'라고 하고 싶으면 학교 이름은 좀 빼주면 안되겠니...
덧2. 학교 후배면 중간고사 기간일 텐데 여기 끊고 공부하자(....)
도대체 이 긴 열폭은 뭔지. 한국 현실이 이래서 좆같다. 그들의 헤게모니에 분노하면서도 찬성한다. 왜냐. 그래야 자신도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걸로 아니까. 압제자는 오로지 피압제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성립한다. 기득권에 찬성하고 권력에 찬성하는 80%가 자신들을 세상을 벼랑으로 몰고 간다.
답글 달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보면 알 수 있듯이 인터넷에서 열폭하는 녀석들치고 현실에서 존재감 있는 경우는 없다. 한국의 미래는 아직 밝은 것 같다. 쓰레기는 이렇게 리라하우스에 분리수거가 잘 되니까.
중요한건 그게 아니라,
두살짜리 아들이 보육원을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자말자 걷고뛰는 가젤이나 기린도 아니고 저런 어린애를 보육원에?
ㄱ-
돈 안 들이는 건 부모입장에서 좋은 것. 돈 들이나 안 들이나 결국 갈 놈이 가는 거지. 돈 쳐바르면 공부 하나도 안 해도 대학갈 거 같아? 웃기지 마. 결국 지가 앉아서 공부 많이 한 놈이 가는 거야. 사실 학원 다녀봐도 학원에서 얻는 거 유용한 거 별로 없다. 물어볼 사람이 많아서 편리하다 정도인데 이것도 학교 선생님한테 물어봐도 되는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연대 정도면 학원 안 다녀도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거 갖고 뭐... 등록금은 일해서 버는 거잖아 장학금 받는 것도 아니고. 난척 할 걸 해라. 쪽팔린다.
http://cafefiles.naver.net/data27/2008/2/15/290/1_kimuhri007.jpg ㅋㅋ
* 이번 이야기는 2ch의 VIP게시판 이야기가 아니라 , 근현대사 게시판의 이야기입니다.
1
너희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들은, 리얼한 실제역사를
모두에게 들려주기 위한 게시물.
역사상의 유명인과의 접촉
역사상 중요한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
조상님이 영웅인데, 그 가족만 아는 이야기
그 외, 아무래도 좋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좀 써 줘.
개인적으로는 일본개항부터 러일 전쟁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11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의 돌아가신 할머니는, 젊었을 무렵 도쿄 긴자에서 밀크 셰이크를
처음 마셔보고 세상에 이런 맛있는 것이 있다니, 하고 생각하셨다고w
13
다이쇼 후반부터 쇼와 초기 시대 이야기이지만, 우리 증조 할머니는 소학교를 졸업한 후, 현지의
현립 공업학교에서 자동방적기를 배우면서 일했는데, 당시로서는 무척 중요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소학교 교장과 같은 수준의 급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몇 달에 한번씩 친척들에게 집과 땅을 사줬다고. 그 무렵 나이가 13세 즈음이셨다고 하니까,
지금 시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지.
16
그러고 보면, 증조 할머니의 증조 할아버지 or 할아버지는, 도쿠가와 막부의 낚시, 사냥을
안내하는 수행원이셨대. 그 대가로 도쿠가와 가문의 아욱문장이 들어간 칼이나 옷같은 것을
선물로 종종 받았다고.
한번은 친척 애가 학교에서 싸움이 났을 때 그 칼을 가지고 보복하러 간 적도 있다고w
쇼와 시대에 건달이었던 사촌 어르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갖고 다녔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여튼 지금보다는 법률이 느슨했던 것 같다.
17
>>16
진짜 도쿠가와 가문의 칼이라면 대단하다
그거 지금은 중요문화재 아니야?
19
>>17
그럴까?
10개 쯤 있었다고 하니까, 보검같은 것은 아니고 흔히 선물로 내리던 물건이 아닐까?
하나는 아직도 외가에 있는 것 같지만, 나머지는 전쟁 때 공출당한 것 같아.
다른 물건들은, 다락방에 쌓아두었는데 태풍이 불어 지붕째로 날아가는 바람에 다 잃어버렸다고w
일단 내년에는 외가에 돈을 싸들고 가서 그 칼을 받아올까,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w
37
할머니가, 고조 할머니로부터 들은 러일전쟁 이야기입니다만
고조 할머니는 당시 일본이 러시아에게 이길 전망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셨다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긴 것은 도고 제독 덕분이라고...
38
당시의 일반 서민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굉장히
흥미가 있었는데, 이 게시물 방향성 좋다.
39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자폭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44
우리 할아버지는 시베리아로 끌려갔지만 생환하셨다.
할머니는 공습으로 폭탄이 떨어지길래 죽겠거니, 생각했는데
그 폭탄이 뒷간에 떨어지는 바람이 불발되었다고.
48
다이쇼 시대, 할머니의 할아버지는 공무원이었는데 퇴직금으로 말 한 마리을 받았다고.
그런데 매우 영리한 말이라서 농사 일을 하다 곧잘 탈주했지만 저녁 밥 먹을 때면
꼭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5
>>48
웃기다wwwwww
한가로워w
113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노몬한에 끌려가셔서(역주:1939년 일본-소련 간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
당시 장비가 열악했던 일본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바 있습니다)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돌아
오셨지만... 지금은 소련 측의 자료가 공개되어 쌍방이 모두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왔지만..
당사자로서 느낀 것은,
「이만큼이나 장비에 차이가 있으면 절대 이길 수 없어....」
115
내가 10살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러일전쟁 개전시 도쿄에서 학도군으로 출병, 랴오양, 심양에서
싸우셨다고. 대학 동기들도 많이 지원했지만, 뤼순공격 당시 거의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무리한 공격을 지시한 노기 대장 때문에 좋은 놈들이 많이 죽었다」라며 평생 그를 싫어하셨다.
육군소속이었음에도 해군의 도고 제독을 신처럼 우러러봤고, 심지어 거실에는 그의 사진을 걸어놓으셨을
정도.
태평양 전쟁 때는「도조 히데키같은 미치광이가 일으킨 전쟁, 절대 이길 수 없다」라고 공언하고,
선거에서 전쟁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후보를 응원하거나 자유주의자를 집에 숨겨주거나 했기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고 사복경찰관이 집 근처를 서성이기도 했다고. 만약 재향군인회의 임원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체포되었을 거라고 한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에는 도리어 재향군인회 임원이었던 사실이 문제가 되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셨다.
「모처럼 전쟁이 끝났는데, 한창 때의 특별 고등경찰들보다도 이 빨갱이들이 더 지독하다」
라며 한탄을 많이 하셨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다시 공산주의 세력이
몰락하고 외할아버지가 다시 마을유지로서 힘을 갖게 되셨다고.
119
다이쇼 시대에 태어난, 돌아가신 할머니는 오사카 중심부에 거주하셨던 초 명문가 아가씨.
다카라즈카 연극을 매일같이 구경하고, 고베의 외국인이 경영하는 케이크 상점이나 초콜릿
가게에 쇼핑을 다니셨다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별장으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스키야키나 아이스크림을 부족함 없이
드셨다고 하고, 남동생은 집에 있는 설탕이나 물엿으로, 그걸 미끼로 무수한 여자들을 헌팅
하고 다녔다고 하고...
거의 현대와 다름 없는 높은 문화수준을 향유하셨지만,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도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대해 '일본과 같은 편'이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훌륭한 사람이라 옹호한 것에서,
시대를 느낀다.
145
우리 할머니는 91세이신데,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와 만났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 할머니가 다니던 여학교에 왔는데, 학생대표로 할머니가「각하, 휘호를
남겨주세요」라고 하자, 아무 말 없이 멋진 필체로 글을 남겨주었다고. 그건 아직도 학교에
남아있다고 한다.
뭔가 한 말씀 하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아서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귀가 안 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하는데,「휘호를 남겨주세요」라는 말에 곧바로 글을 써주었다는 점에서, 장애는
아니었라고.
235
우리 할아버지.
젊으셨을 때, 혼다 소이치로(역주:대기업 HONDA의 창립자)와 아는 사이셨는데,
혼다 소이치로가 처음 오토바이 가게를 시작할 때「함께 하지 않겠는가?」 하고
권유를 받았지만 돈이 안 될 것 같아서 거절하셨다고.
아아, 할아버지! 보는 눈이 너무 없으셨어요!!
237
>>235
당시 혼다는 인근(아카사카?)에서는「속도광」수준으로, 조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던 것 같아. 무리도 아니야.
247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할아버지나 증조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 '일본근대문학의 어머니' 요사노 아키코씨의 옆집에
살았는데, 요사노 아키코는 당시 인근에서는「그 애랑 놀면 안 돼!」라고 일컬어졌다고 한다.
불량녀였던 것 같다.
250
>>247
뭐,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무렵에 연애 결혼은 불건전한 일이었다고. 그 시절부터 자유분방한 성향을
보인 그녀니까, 그런 만큼 아무래도 평이 좋을 수는 없었겠지
252
우리 할아버지는 관동군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돌아온 것이 쇼와 24년(1949년).
그 때 우리 아버지는 5살로, 사진으로 밖에 자신의 아버지를 몰랐으니까 사진과 다르게 변해 버린 할아
버지를 처음 보고「아빠왔다」라는 말을 들어도 전혀 실감이 없고 낯선 아저씨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망
쳐버렸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괴로우셨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는 전원이 영양실조로, 매일같이 전우가 죽었다고 한다. 어젯 밤「잘 자라」,
라고 했던 동료가, 아침이 되면 죽어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간다!」라고 계속 강하게 다짐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라고. 8년 전에 돌아가실 때까지 러시아인들을 저주하셨고, 심지어 돌아가실 때 남긴 유언마저
「러시아 놈들만큼은 믿지마라」였다.
597
증조 할머니가 어렸을 적, 자주 집의 근처를 야마모토 곤베에(역주:러일전쟁 당시의 해군제독이자
총리를 2번이나 역임한 인물)가 출근용 마차를 타고 지나다니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린 증조 할머니가「곤베씨!」하고 부르면, 서민이 부른 것이었음에도「네!」하고 대답하며
마차에서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고 한다.
599
>>597
이 이야기, 사실이라면 이 게시물의 이야기 중에서 제일 레벨 높지 않아?
당시 최고 권력자와 접했을 뿐 아니라 그 익살맞은 평소 모습까지 엿본 셈이니까···
823
우리 할아버지도 시베리아 억류 경험자.
시베리아 억류의 비참한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할아버지에게 물어봤지만,
「러시아인은 상냥했다」라는 전혀 예상 외의 대답이 왔다.
할아버지 가라사대, 러시아 병사들은 잔반도 잘 줬고, 그래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정말 좀 황당한 야기이지만, 할아버지는 어쨌든 살아서 귀환할 수 있었다는 자체에 감사
하고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이외에도, 강제노역으로 농사가 끝난 후 수확한
감사가 한 명당 2개씩 배부되어 그것으로 떡을 지어 먹었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 뿐이었다.
827
>>823
전쟁 종군기록같은 것을 봐도,
소련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사람조차도 러시아 사람은 뜻밖에
상냥했다는 기록은 쉽게 발견할 수 있어. 대개는 음식관련 이야기지만...
그리고, 포로를 폭행한 소련 장교가 이등병으로 격하된 이야기 등, 일본군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도 종종 있었다고.
전파만세 - 리라하우스 제 3별관 의 역사와 서민들의 이야기 에서 트랙백 할아버지가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가신 적이 있다는 것은 어릴 때 부터 알고 있었지만 일종의 참전자라는 ..
역사와 서민들의 이야기 .....수집하면 꽤 재밌을 것 같은데 연구비 대주려나요 (어이)
http://newkoman.mireene.com/tt/1718 리라하우스는 아시는 분들은 아실테고, 모르는 분은 모르실겁니다. 2ch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번역해서 올려두시길래 가끔 가봤다가 얼마간 안갔는데.. 지..
소련병사가 상냥했다라... 개인성이거나... 의외로 '제국주의자들에게 희생된 같은 프롤레타리아'라고 잘해준 사람도 있었을지도.
순전히 추측이지만... 실제로 어떠했다는 건 접어두고, 장차 혁명으로 전세계 억압받는 인민을 해방하겠다는 국가적 사명을 안고 어떤 '도덕적 비교우위'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테니 포로대우에도 정책적으로 그런 면도 있을 수 있겠네요. 중국 사회주의 정권이 인권은 개판인데 남녀평등에는 졸라 관심을 쏟았다는 식.
물론 독일군에게는 전혀 아니었겠죠.
재밌네요 ㅋㅋㅋ 정말 알고 있는 얘기가 있다면 한마디씩 써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일단 저는...
1905년생인 증조할머니가 고종을 실제로 뵌 적이 있으시데요.
울집이 전주 이씨 가문이라서 전주 이씨 집성촌에 살고 있거든요. 지금도 마을 주민의 반 이상이 전주 이씨구요.
조선 후기 국정이 문란할때(아마도 철종 즉위 무렵이라는 듯 해요) 서울에서 사람이 와서 왕위에 오를 만한 사람이 있나 찾으러 왔다는 얘길 들었어요. 참고로 고향집은 전북 김제 ㄷㄷㄷㄷ 한때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었지만 세종의 넷째 아들이었던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사는 동네였던데다가(즉 왕위 계승 순위에서는 멀고 먼 친척들) 지금도 서울에서 김제까지 버스로만 3시간 걸리는데 그 당시 우리 동네까지 왔었다는 건...역시 조선 후기 사회가 얼마나 혼란의 도가니였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의 단면이겠지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는 대학가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을때
그런거에 아무 관심도 없으셨고 단정한 머리에다가
갈색 잠바같은걸 주로 입고 다니셔서
운동권 학생들이 저희 아버지가 눈에 띄면
"짭새다"라고 하면서 도망갔다는 일화가...
...나의 할아버지의 엄청 오래전 조상은..........
원숭이다. 나무에서 바나나를 따먹으셨지
그분은 바나나를 먹다 질려 땅으로 내려와 바닥에 흰개미를 잡아 먹기를 했는데
그때 흰개미를 잡을려고 손을 많이 쓰다보니 저절로 지능이 발달되었고 대가리가 조낸 커지면서
몸퉁이 털이 다 빠지고...어느샌가 뒤돌아 보니 꼬리가 짤려 있었데.
할아버지가 제모를 할줄은 몰랐어. 정말 위대하신 분이야.
얼마전에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이북에선 집안이 방귀 꽤나 뀌는 집안 이었다네요.
그냥 재산이 많은게 아니라 학식있는 의사집안이었다네요-.-;
게다가 처가는 [장씨네 땅 안밟고 못돌아다닌다]소리가
나올 정도로 큰 지주였나본데 역시나 해방후 소련군 진주하면서 캐몰락(..)
그런데 할아버지 말씀 들어보면 남들처럼 비장한 각오로 고향과 재산 버리고 삼팔선을 넘으신게 아니라
갖 결혼해서 할아버지 횽님이 하는 의원일이 너무 힘들어서 아내랑같이 서울로 핑계대고 도망쳐
나오셨다던데;; 6.25크리 맞으셔서 졸지에 실향민이 되셨다는-.-;;;
제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는 섬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일제시대때 순사(정말 순사임, 박순사라고...)가 한명 있었는데
술먹고 잠든 노인을 집에 데려다 주는등 평가가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
제 아버지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군생활을 하셨는데
당시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어떤 분(화려한 휴가로 유명함)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당시 '초 비상사태(북한이 아니라 쿠데타니까)'
였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안 물어봤음
우리 할아버지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6.25때 고향에서 징집되셨는데
당시 영어를 조금 일찍, 열심히 배워두신 덕분에
미군부대 관련 행정직으로 빠지셨다고..
덕분에 이런저런 보급물자를 나눠받아서 살림에도 보태시다가
1.4 후퇴 즈음에, 그때까지 계속 동행하신 할머니께서
'느낌이 좋지 않다'는, 미묘한 육감을 발휘하셔서
그간 가지고 있던 개인물품과 봉급을 챙겨서 도망나오셨다고 합니다.
부대에 남아계셨다면 중공군에 휩쓸려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그런데 이 덕분에 군적이 제대로 남아있질 않아서 군대에 2번 다녀오셨던 ㅠㅠㅠㅜㅠㅜㅠㅜㅠㅜㅠㅜ
지못미 할아버지
저기 시베리아이야기는 저희 외할아버지 이야기로는 당시 소련이 다민족국가여서 출신성분마다 행동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일례로 어디쪽 출신군인은 상냥하게 대해주는데 다른쪽은 아무말도없이 손을 내밀면 뭐라도 줘야했고 안주면 그자리에서 죽이는 악랄한 행동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실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군시절에 장난삼아 팔뚝에 새겨둔 문신 (유치하게도 'love') 때문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실뻔 했다더군요
뭐 지금 서른 안팎인 사람들만 해도 소위 '전땡뉴스'를 어린시절에 체험하고 살아온 사람들이죠....
저희 작은증조할아버지?께서는 독립운동가.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무려 와세다대학에 유학을 가셨다가
현지 징집;;되어 졸지에 일본군이 되셨!?.....그래서 집 분위기가 초큼 좋지 않았더랩니다.
나름 그 지역 유지 축에 들었던지라 고이 자란 할아버지께선 책만 읽을 줄 아시고 별반 할 줄 아는 것도 없으셔서 걍 분위기상 일본군으로 참가한 것 같긴 한데....-0-;;
아 그러고보니 할아버지께서 만주 치러 가셨을 때(?)...거 누구더라 유명하신 장군...김좌진?암튼 그때 돌아 오시면서 호랭이를 생짜배기로 잡아오셔갖구 그 가죽으로 베낭을;;;;만드셨대요.
근데 625크리 터지고 나서 피난한 사이에 할아버지 댁이 제일 크다는 이유로 적군의 진지가 되었고,
전쟁 끝나고 고향에 다시 돌아와 보니 그 호랑이 베낭이 없어졌더랩니다.
누가 훔쳐갔나봐요. 아 아까워 ㅅㅂ 꿈...
엄마의 고모할머니는 이북과 남한의 경계쯤의 부잣집에 사셨는데
이 분의 사고방식은 인간은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
근데 남한군이 밥을 얻어먹을 때는 안방까지 쳐들어와서 밥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릴 질러서 벌벌 떨면서 밥을 먹여 보냈는데,북한군이 얻어먹으러 오면 졸병들은 집 밖에 대기하고 대장만 마당에 들어와서 식사 좀 얻어먹겠습니다 하고 부탁하더래요.
고모할머니 왈,"남한 선전 다 거짓말이다.남한군은 상놈이고 북한군은 양반이여."
어린 저는 그런가보다..했는데,아빠의 해석이 멋지더군요.
아빠 왈,"역시 남침이 아니라 북침(북한이 먼저 침략)이 맞구나.
급히 짜여진 오합지졸 남한군에 비해, 북한군은 준비되고 잘 훈련된 병사였어."
북한에 의한 6. 25 남침입니다. 정설은 북한이 남한을 침범해서 남침이고, 일부 학자들이 남한이 북한을 먼저 쳤다고 주장하면서 북침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죠.
별 얘긴 아니지만 저도 한번.
아버지 고향이 지리산 바로 근처 시골이예요.
정확히 몇년도인지는 모르겠는데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소위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을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불러모와서 총으로 쏴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 친척 중에는 해를 당한 사람이 없었는데(8촌쯤 되는 친척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그 당시 시골 마을이란 마을끼리 다 알고 지내고 그렇잖아요. 가까운 동네 아저씨, 같은 분들도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도 가끔 고향 누구네 집 삼촌이 그때 죽었다 이런 이야기 하셨고요. 그래서 아직도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대요.
저도 뭐 대단한 이야기들은 없고
할머니 이야기를 어릴때 몇가지 들었는데
할머니께 오라버니가 몇분[세네분? 기억이 잘;;] 계셨는데 그 중에 한분은 국군이 되시고 한분은 북한의 인민군이 되셨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인민군이 되셨다는 오빠분이 그 당시 워낙 머리가 좋고 영특해서, 공산주의에 빠져들지 않았나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튼 전쟁으로 인해 두분 다 돌아가신 것 같다고 그러시고, 할머니쪽에 그런 분이 계셔서 저희 아버지의 형제들은 사관학교를 가려고 하셔도 갈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뭐 그것도 10년 지나지 않아 괜찮아 진 것 같지만[막내삼촌은 ROTC 복무하시다 장교로 군입대 하셨으니;]
뭐랄까 굉장히 씁쓸하면서 안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한번 들었을 뿐인데 아직도 기억나네요.
우리는... 별거 없어요.
그저 외할머니 쪽이 625때 북한에서 내려왔다는 정도...
모두 무사히 내려와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TV감 되었을지도.
그럼 전 영원한 잠수의 세계로...Zzz
방금 할아버지한테 여쭤봣는데,
6.25때 인민군이 와서 노동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주로 땅파는 것....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아시는 어떤 분은 일제시대 때 부산 살다가 섬으로 갔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인육(사람을 죽여서)을 드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예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맛이 어땠는지는 말 안해줫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 본 어떤 할아버지는 예전 6.25 때는 자기 아는 사람이 인민군의
납탄에 죽었는데 저격을 할때에는 총쏘는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맞추기 어려운데 총쏘는 사람 윗쪽에
있는 사람은 맞추기(겨냥하고 조준하는 것) 쉬어서 어떤 사람은 인민군이 오자 산 위로 도망을 갔다가
총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영화 대부(1972)에서 경찰관이 계단으로 도망쳐 올라가는 사람을 총으로 조준해서 저격하는게 생각나는군요.
(지금부터는 정말로 사실이 아님)참고로 고기는 칼로 찣어서 먹여야지, 총에 맞아죽은 건 총알을 빼내도 화약때문에
고기맛을 버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쓰던 기관단총은 총알이 관통하지 않고 박혀 있기 때문에 고기먹을 때 먹기 어렵다고 합니다. 게다가 자동 사격이라서 총알이 너무 박혀서 피 색깔도 이상하고 아무튼 안 좋다고 합니다.
그래도 총상 때문에 형체가 알아보기 어려운 건 먹기가 쉬웠다고 합니다. 형체가 온전한 건 먹기가 어려웠다는 군요. (고기가 어떤 고기인지는 알아서 상상하시길)
그리고 사람을 죽일때는 아무리 훈련을 많이 받았어도 처음으로 사람 죽일때는 망설여진다고 합니다. 그럴때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나 동물로 생각해버리면 쉽게 죽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타자화'시키는 것)
군대에서 "우리의 주적은 xx라고 교육시키는 이유는 목적의식을 가지게 함으로써 전투피로증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할머니 세대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희 외가는 광주 출신입니다. 그 전땡 아저씨가 집권할 무렵은 정말 흉흉했다나봐요. 거리에서 사람 후려쳐서 끌고가는 사태가 수두룩했다 그러더라구요. 저희 어머니는 광주민주화항쟁때 고등학생이었는데,큰 조카를 등에 업고 거리를 가다가 총소리가 들려서 근처에 있던 손수레 안에 조카를 집어넣고 몸으로 막았대요. 어떻게든 이 애는 살려야한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그 후에 할머니가 무슨 일 일어날지 모른다고 엄마를 집에 가둬두다시피 하셨다더군요.
전화같은 것도 안되고,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어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다나봐요. 시민군이 일어난 후에도 일반 시민들은 그게 자칫 폭동이 될까봐 걱정했다니 정말 순박했죠; 그래도 사람들끼리 쌀이나 김치 모아서 시민군 주고 그랬나봐요. 시민군 사람들도 무기 들었으니까 자칫 험악해질까봐 엄청 조심하면서 돌아다녔대요.
그리고 막내 삼촌은 서울에 있어서 휘말리는 일은 없었는데(평소 엄청 드센 성격이라 있었으면 시민군 참전했을 거라고 할머니가 욕;하시더군요, 실제로 삼촌 친구분들은 그 때 많이 돌아가셨대요) 광주사태 이후로 군대갔다가 '빨갱이들 들어와서 군대 뺑이치게 만든; 광주출신'이라고 엄청 텃세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깔이 엄청난-_-; 분이라서 삐딱선 타고 들어오는 텃세에는 일일히 맞대응해서 결국 상대쪽에서 빌고 들어왔다고..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 고생하셨을 것같지만 그 이야기는 안해주시더라구요.
덧붙여서 당시 서울 사시던 아버지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 몰랐대요. 모든 매스미디어가 완전히 차단되서 광주 이외 지역 사람들은 정말 북한 간첩사태인줄 알았다더라구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지금도 매스미디어 안믿으십니다-_-; 가끔 아버지가 인터넷만 됐어도 전x이 그 짓 못했을 거라 그러시죠.
아, 할머니 이야기.
일제 시대때 창씨개명있잖아요. 저희 할머니도 그거 하셨는데 당시 마을 풍조는 별로 큰 의미없이 '나라에서 하라니까'하고 하는 분위기였대요. 단 개명까진 좋은데 실제로 그걸로 부르고 다니는 경우가 없었다고-_-; <슈후쿠던가 오후쿠던가 암튼 그거였지>하시는데 너무 여유로운 분위기라 듣던 손녀는 벙..;
그리고 할아버지는 당시로는 말도 못할 장신에 굉장한 신식 멋쟁이셨다고. (제 어머니가 세살 때 돌아가셔서 저는 얼굴도 모르지만 단지 결혼한 후에도 맨날 뭐 만든답시고 앉아서 빈둥거리는 게 속터져서 한번은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구상한 것들을 죄다 태워버리셨대요. 그 만들던게 "모를 자동으로 심어주는 기계(...)"였다고(....)나중에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런 기계가 정말 나와서 그 사람이 앞서가는 인간이긴 했구나 싶었대요. ...그거 안 태웠으면 지금쯤..OTL
아, 하나더. 전땡아저씨가 있을 때,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날때 이야깁니다.
그때 대학생들이 시위를 할 때, 앞에는 체육계(흔히 말하는 떡대 좋은) 학생들이 서로서로 팔짱끼고 앞으로 앞으로 주도적으로 나가고, 뒤에서는 다른 대학생들이 뒤를 따라가며 시위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시위를 하니 진압이 시작되었는데 진압이 시작되니까 이게 대열이 흐트러졌다고 하더군요. 대열이 흐트러져서 모두 도망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군대와 경찰을 피해서 도망가고, 뒤에서는 경찰이 쫓아오는데 그때 어느 덩치 좋은(체육계)남성이 어느 여성분을 구해줬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둘은 눈이 맞아서 제 친구 부모님이 되셨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우리집 이야기 하나 더.
우리 할아버지는 서자출신(그것도 셋째 부인, 즉 둘째첩ㅠㅠ 의 아들;. 그런데 증조할머니는 또 초혼도 아니셨다고. 우리 증조할아버지 대체 뭐하시던 분인지 좀 의심감....-ㅂ-;;;
큰할배네(...즉 적장자;; 사는걸로 봐선 오지게 부잣집이었던 거 같긴 한데, 서자한테 돌아올 재산따위 개뿔 없기에 할아버지는 배를 타셨다네요. 그래서 저희 할아버지 직업은 간지나는 마도로스+_+ 그 시절에 필리핀, 미국, 인도 가보신 분 흔치 않으셨을겝니다. 하지만 저희 할머니는 덕분에 반 과부 신세....ㅠㅠ 일년에 두 번이나 보셨을까요. 할아버지가 젊어서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저희 아버지를 비롯해 고모들, 작은아버지가 태어난게 신기할 정도.
어쨌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귀국하실 때마다 진귀한 선물(...)을 받으셨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굵기가 거의 허벅지 정도로 튼실한 살라미 소세지, 인도 사라사, 마카오 빨간 우단 등등.... 그래서 할아버지 살아계시던 시절에는 패션 리더셨다고. 인도 사라사로 만든 한복이라니, 이거 멋지잖아요 -_ㅠb
아, 그리고 소세지는 숭덩숭덩 썰어서 김치넣고 지져 드셨대요....=ㅂ=;;; 맛있으셨다고. 요새도 부대찌개 꽤나 좋아하십니다 ㅋㅋㅋ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먼 과거의 일도 아닙니다. ^^ 제가 유치원 다닐 때 광주에서 '그' 일이 벌어졌었지요.
당시 법원에서 도청 가는 길목(그 사이에 조선대가 있습니다)에서 살았었는데, 아침에 유치원 가려고 나서는데 군인들하고 탱크(^^;;;;가 지나가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엄마 탱크 지나가, 그랬더니 오늘은 안가도 되는 날이라고 말씀하셨었지요. ^^ 지금 생각해 보면 장갑차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지만 그 때는 그냥 다 탱크... ^^
제 여동생은 당시 3살, 아버지께서 업고 옥상에 올라가 계셨는데, 동네 뒷산(지금은 시립도서관이 지어져 있습니다)으로 총을 둘러멘 사람들이 거적대기 같은 걸 메고 올라가는 걸 보고 총 맞을까봐 무서워서 내려오셨다는말씀도 하셨지요. 아마 당시 진압군이었던듯..
할아버지는 지주셨는데 외할머니는 지리산 빨치산 출신입니다. ^^;;; 외할머니께선 산에서 내려오신 뒤에 할아버지네 댁에서 소작농을 하셨는데 아버지께서 소작농의 딸에 필이 꽂혀서 결혼하신 것.. ^^;;; 외할머니께서는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시지요. 온 몸 여기 저기에 흉터가 많습니다... 이념의 시대에 참 불행한 일들이 많았었지요...
할아버지,할머니께선 창시개명했다는데 격렬한 반대 이런거 없이 위에서 시키니깐 그냥 그러러니 하고 쓰다가 넘어갔답니다.
외할머니께선 학교를 일제때 다녔으니 일본어를 좀 아셨죠. 그래서 어머니도 외할머니께 좀 배우셨고...
그러고 보니 우리집에 파란만장한 가족사는 없군요.
다만 농촌이라 일본에서 쌀 수탈로 쌀밥은 커녕 굶는게 일상이였다 정도네요.
6.25때는 근처에 산이 있는것도 아니라서 빨치산은 남에 이야기였고 외할아버지,할아버 모두 상처없이 전쟁에서 무사귀환.
큰아버지는 월남전 참전했는데 요즘에 TV보시고는 교엽제 후유증 없는게 다행이라고 하시네요. 전역하시고는 중동지역가셔서 일도 하셨는데 어릴적에 서랍에서사막사진 보고 신기해했었죠.
생가해보니 평범한 소시민 레벨..
저희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두 분다 6.25 참전 용사셨죠. 그런데 할아버지는 전방에서 고생하셨지만, 외할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나셨는데, 일본에서 중학교를 나오셔서 덕분에 후방으로 빠지셨답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큰아버지 깨서는 좌익 항일운동가셨는데, 해방후인가 전인가 가물하지만, 전라도 해남에 작은학교를 세우셨죠. 하지만 결국 해방후 혼란기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무튼 전쟁후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농사지으시고, 외할아버지는 계속 군인으로 남으시려다가 결국 제대하셨습니다.
첫 째 이모는 광주민주화 운동때 그 현장에 있기도 했네요.
제 고향(어른들 고향)은 경남 의령의 시골인데 625때 마을이 북한군 야전병원이었답니다. 의무대장이 중령 계급이었는데 싹싹하고 인사성 밝고「사람새가 된」군인이었다나.
환자용으로 소를 세 마리 끌고가서 잡아먹었는데 나중에 부대가 철수할 때 어디서 가져왔는지 말을 두 마리 끌고와서 주면서 농민의 전재산인 소를 잡아버려서 미안하다고, 대신 말을 줄테니 이걸로 농사일 하라고.
그래서 마을에 말이 두 마리 있게 됐는데, 젊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마을 앞 방죽을 뛰어다니다가 떨어져 다치기도 하고 했답니다.
그러다 한 마리는 난간 없는 다리 위에서 떨어져 죽고, 한 마리 남았는데 돌아온 경찰지서에서 빨갱이 물건이라고 압수해가고 마을 사람들이 지서에 끌려가서 욕을 많이 치렀다고.
나중에 보니까 그 말을 지서장이 타고 다니더라나.
저희 외할아버지는 강점기 당시에
징용 영장(?) 같은 것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당시 분위기가 징용을 가는 것은 거의 "죽으러 간다"는 느낌이여서
술도 공짜로 먹고 마을 내에서 어느 정도 깽판^^을 치는 것은
다들 눈 감아 주는 분위기 였다는데요..
징용 소집이 있던 날..
날짜도 정확히 기억하십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단 일본군이 항복을 했다는 소문이 들어 오긴 하는데,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확실하게 정보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동네 학교 운동장(소집 장소)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동네 야산에 숨으셨답니다.
일단 눈치 좀 보다가, 출첵하는 분위기면 쫓아 가려고..
근데 참 사람 생각은 다들 비슷한건지,
그날 소집 예정이었던 청년들은 하나도 안모이고,
야산 여기저기서 담배 연기만 보였다고 하시네요..^^
저희 할머니는 6.25때 할머니가 집 건너 우물가에 서있었는데 탱크하고 군용짚차들이 우물하고 집 사이의 길로 다가오기 시작해서 증조할머니가 빨리 건너와! 라고 소리질러서 정신없이 뛰어건너왔더니 그대로 3일내내 그자리에 탱크가 지나가고 결국 얼마 못가서 공습때문에 마을이 완전 쑥대밭이 됐다고 하더라구요 ㅇ<-<
와 그때 할머니가 안뛰어오셨으면 저는 여기서 자판 못치고 있었을듯 ㅇㅇ
그런얘기들 가끔씩 할머니나 할아버지들한테 들을때마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된다고 느낍니다 ㄱ-;;; 정말 중요한 가족들하고 친구들이 그렇게 된다면 으으 생각하는것도 끔찍해요;;
이번 게시물 정말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해주네요 ^3^ 잘봤습니다~ 리라님&댓글달아주신 여러분들 ㅋ
이 게시물의 리플들을 보니 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군요.
우리집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께선 보도연맹에서 주는 쌀을 받으려다가 다 떨어지는 바람에 못 받아서 ㅆㅂㅆㅂ 거리셨는데 몇달뒤 곡식 받은 사람들 죄다 끌려가서 총살당하는걸 보고 ㄷㄷㄷ 거리셨다고 하시더군요.
저희 집은 부산 이라...전쟁 이야기는 없고~ 별다른게 없지만...
이 글타래 재밌네요.
저기 위에 일본 순사 이야기가 나와서말인데요.
몇년전 TV 에서 시골에 있는 할머니가 초등학교은사 (일제시대니깐 소학교 은사)를 찾는데
일본인 선생이더군요 (일본까지 가서 만났습니다.)
칼 차고 수업을 했지만, 교육자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고.
부인은 동네 아낙네들과 같이 일하고... 평판 좋고~
일제시대를 살아온 어르신들은 전부 일본을 증오하리라고 생각했던 저에겐 꽤 충격!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대단한 수재였다고 합니다.(듣기로는ㅡㅡ)
와세다 대학을 나왔는데, 사진으로 본 모습은 말 그대로 지식엘리트 타입.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일본에서 고위 경찰로 재직하면서 재산을 상당히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오자, 재산을 전부 금으로 바꾸어 가방에 넣어 귀국선에 탔다고 합니다.
그 때 귀국선은 완전히 아비규환이었죠... 그걸 견뎌내고 부산에 도착하고 보니.
......없네?
결국 실의에 빠져 동네 애들이나 가르치면서 술로 여생을 보내다 일찍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동안 집안은 완전히 몰락.
열받은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저작들을 몽땅 불태워버리셨다고 하죠.ㅡㅡ
명문가 할머니에 대한 글이 저희 외할머니 이야기랑 비슷하네요.
외할머니는 전국 레벨 재벌가의 딸이셨다고 합니다. 마침 외할머니가 태어나셨을 때 집안이 더 잘 되기 시작해서 복덩이라고 귀여움받았다고 해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치마저고리 입을 때 혼자서 모직 원피스 입고, 간식거리가 귀하던 시절이라서 빵 부스러기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며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학교에 기부도 많이 했는데, 한 번은 피아노를 기부했더니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과 전교생이 외할머니한테 허리숙여 절을 했다고 합니다-_-; 일제시대라서 일본식 감사 인사를 한 거겠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백화점 구경을 다니는 등 한가로운 생활이었지만,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의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불안정하셨다고 하네요. 당시의 여자로서는 드물게 대학교에도 진학을 하셨습니다. 장래희망은 정치가였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가정과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죠.
집안에 배운 사람들이 많아서 집안 전체가 좌파로 기우는 바람에, 6.25 전까지는 외할머니가 여맹(아마 조선민주여성동맹인 것 같습니다) 위원장도 하시고 했지만 6.25 이후로는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거기다 딸이라서 상속을 받지 못했고, 외할아버지도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돈에 집착하시면서 산 것 같아요. 외할아버지 월급이 자기 한 달 용돈도 안 된다고 도망치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리플들 보면 우리집은 뭔가 내세울 이야기가 없는듯......
다행이라면 할머니의 언니(이모할머니)께서는 위안부 대신 공장에서 노역하셨고
할머니께서는 당시 '너무 어려서' 그런데 끌려가시진 않으셨던....
그 이야기 듣곤 가끔 로리로리거리는 사람들 보면 섬짓했던 기억이.....-_-
그 시절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리 성향이 더 강했더라면 어쩔....이런 생각이
뭐 그 외엔
6.25사변때 할아버지께서 다리에 총 맞으신 것 빼곤 무사히 돌아오셨던거하고 (그걸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조금 전에 말씀해주셨던.....ㄷㄷ)
그나마 부산에 좀 갖고 있던 땅을 (뭐 농사용이죠) 김종필쪽 사람한테 뜯긴거 정도
의외로 할머니께서 전땡에 대해선 좀 긍정적으로 말씀하셔서 좀 놀랬,,
물가랑 조폭은 잡아준 덕분에 없는 사람 입장에서 호구하긴 좀 편했다나.....
저희집안 이야기는
정확히는... 언젠지 3번이나 들었는데 가물가물 하지만 저희집은 천주교 구교 집안입니다.
적당히 잘사시던 조상님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200년전에 집안 자체가 -_-;; 완전 풍비박산이 나서 일가가 모조리 몰살당하시고 저희 집안 선조 3분만(당시 9살, 10살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간신히 도망쳐서 마을과 마을 경계에 숨어 사시면서 옹기장이를 하셨다고 하죠.
도망친 3분중(3남매. 두분이 남성 한분이 여성) 두분은 얼마지나지 않아 일찍 돌아가시고 한분만(저희집안 직계선조) 옹기장이를 하면서 박해를 피하고 신앙을 지켜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뒤로 줄곧 저희 집안에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배출되고 지금 글쓰는 저역시 나름 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물론 103위 순교성인에 이름이 올라가있지는 않지만 나름 자랑스럽습니다.
다만 아쉬운것은 현재 저희집안에서 제 대에 이르러서는 신앙 생활하는사람이 거의 없다라는게 ㅠ_ㅠ;;
아... 물론 이 이야기는 성당에서 하지 않아요 -_-;; 이런 말하면 사람들이 괜히 미워함;;
아, 우리 이모할머니께서 전쟁나기 전에 평양에 계시다가 월남하셨는데, 평양에서 김일성 연설하는 걸 실제로 봤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김일성이 너무 어리다고 쑥덕거렸고, 여자들은 김일성이 잘생겼다고 홀라당 다 넘어가고.
지금으로 치면 완전 얼짱이었다대요. 당시 국내 어떤 남자 연예인들이랑 겨뤄놓고 봐도 지지 않는 외모였다고 합니다 - 물론 당시 기준에서.
결국 여자들한테 인기있었던 게 권력의 기반중 하나.
역시 외모 지상주의는 나쁜 결과만을 낳을 뿐이지요.
역시 우리나라는 625를 비롯한 일제때/해방전후 이야기가 많군요.
일종의 사족을 달아보자면...
1. 사실 625 자체가 세계사적으로 손꼽히는 비매너 전쟁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전쟁에서 찾아볼수 없는, 유례없는 학살이나 만행이 정말 많이 벌어졌다 합니다.
(뭐 여기 오는 분들중에서 아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그래서 매너의 순서는 중공군>>미군(+유엔군)>>북괴군>>국군 이었다고 하는군요.
일단 중공군은 굉장히 오랫동안 게릴라전을 하면서 매너가 몸에 밴 지휘관들도 많았고
미군이야 뭐 한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뿐이지 여러모로 매너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괴군도 오랜시간 훈련을 시키면서 "인민의 군대"를 모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민피해를 엄금했답니다. 물론 지역주민들중에 반동을 색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요.
가장 안습은 국군. 상당부분 급조된데다가 우익/극우/친일/파쇼/전향한좌익 가리지않고
한데 어영부영 모여있는 바람에 강한 규율이 아니면 군대 자체가 유지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통제냐 방임이냐에 있어서 어쩔수없이 통제를 택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었던
거죠. 이런 강압적인 군대에 별의별 사람이 다 끼어 있으니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나기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국민방위군 사건, 625 직전의 크고작은 반란사건 등등...).
2. 김일성은 실제로 매우 잘생겼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귀국 직후에 찍은
아직 살도 찌지 않은 슬림한 김일성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해방 후 정치지도자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았던데 비해
30대의 젊은 김일성이 혜성처럼 등장하자 대부분은 새롭고 참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언론이 부풀린 김일성 전설도 대단했죠. 이 부분에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단 만주의 유능한 게릴라 대장 중 한명이었지만 실제 전공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국내 좌파중 가장 인망있던 인물은 여운형이었고, 우파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조만식 선생이었으나
김일성은 사실 소련의 덕을 많이 받은 케이스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안습의 캐릭터인 박헌영에 비교하면 천하를 얻은거나 마찬가지죠.
보도연맹 이야기 나오니 한가지 더 생각이 났습니다.
위의 군대 두 번 다녀오신 할아버지.. 의 사촌 되시는 분들은
당시 그럭저럭 지주층에 속하는 분이셨는데
전쟁발발 전후로, 매일 얼굴보고 지냈던 마을 사람들부터
재산의 분배상태에 불만을 가졌던 일가친척들..까지
프로파겐다에 쩔어 흉흉한 분위기가 멎지 않았다고 하네요
옆마을에선 집에 불을 지르고 집주인을 끌어내
돌로 쳐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다고 하지만
그정도까지는 아니였고..
보도연맹쪽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묘한 소집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전쟁 준비의 일환이었을까요)
매주 주말, 휴일 오전 몇 시에 마을회관에서 종소리가 들리면
준비를 하고 마을회관 앞에 2열종대로 정렬하는 일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발발한 후엔, 관련된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보도연맹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한 국군의 훼이크로 쓰였다고 합니다.
종이 울린 후 모인 사람들을 모두 데려가서, 그대로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 장면으로..
우리 큰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나름 배운축이셔서 초시를 하셨대요..그래서 징용은 패스..근데 외할아버지는 징용끌려가셨다가 탈출해서 생감자 먹으면서 견디시다가 겨우 귀국하셨대요..근데 곧 6.25터져서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 죽였다고 하시대요..외할아버지도 장사하셨는데 마침 인민군 왔을때 딴 동네 가 계셔서 살아남았다고...글고 아버지 고향이 지리산이랑 가까워서 빨치산 색출작업이 대단했다고 하더라고요..그때 빨치산 좀 잡았다 하는 사람들은 권력이 장난 아니었다고 합니다...
둘째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남들은 독립운동이니 뭐니 하는데
혼자 여자애들을 여럿 울리고 다니다가 그만 복상사...
그 바람에 집안이 기울고 할아버지는 일본에 노동하러 갔다가 한국인인 할머니를 만나 결혼~
아 정말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네요. 저도 한번 덧붙여 볼까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돈을 버셨다고 하더군요.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고물장사 같은 것을 했는데 의외로 일본인들이 그닥 천대를 하지 않고 돈도 그런대로 버셨다고 합니다. 그 반면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소랑 쌀도 빼았아가고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도 할머니께서는 일본놈들 독한놈들 이러시던데...헌데 한국전쟁 때는 경주 산골 완전 촌구석에 사셔서 전쟁이 났을 때도 뭐가 일어났는지 거의 몰랐다고 합니다. 미국은 그래도 소문으로 들어서 알았지만 소련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시더군요. 다만 빨치산에게 밥을 줬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이웃이 있었다고 합니다...외가의 경우에는 외증조할아버지가 스님이셨는데 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끌려가서 졸지에 결혼(...)을 하시게 됩니다. 덕택에 외갓집은 정말로 독실한 불교집안이 되었고...외할아버지께서는 청소년 시절에 징집(선동에 현혹되었다고 했었나?)되어서 일본군에서 전투기를 몰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싸웠는지 아니면 훈련만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전쟁 때에는 군복입고 일하다가 군인들에게 군복 입지 말라고 한소리 듣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엔 군복만큼 좋은 작업복이 별로 없었는데 민간인 식별 때문에 정부에서 민간인이 군복을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하더군요. 전후에는 일본에 가있던 시절 공부를 많이 하셨기 때문에 학교도 세우시고 교장도 하시고 그랬습니다. 퇴임하신지는 오래되었지만 유치원 시절 퇴임식에 갔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아 참고로 작은 외할아버지께선 일본에 그냥 눌러사셔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있다고 합니다. 격동의 시대가 외국에 사는 친척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은...뭔가 신기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간만에 역주행하다가 이 스레가 언급되었길래 찾아 읽어보고, 저도 뒤늦게 글 남겨봅니다.
증조할아버지가 고종때 어의셨습니다. 제사 지낼때 '궁내부주사부군'이라고 쓰던데요.
어의들 가운데 특히 부인병에 전문이셨는데, 명성황후 사후 후비가 된 순헌황귀비 엄씨(엄비) (영친왕 이은의 생모)가 부인병으로 고생하시던 걸 완치시켜주고, 큰 상을 받으셨었답니다. 그때 커다란 화분을 하사받은 게 있는데, 화분은 없어졌지만 그 화분 받침이 아직도 집에 있습니다.
궁을 나오신 후에는 경성 한복판에서 한의원을 여셨는데, 지방에서도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했고, 순서를 기다리느라 며칠씩 집에서 묵어가는 환자들도 늘 있었고, 그런 사람들 먹일 밥을 짓느라 매일 쌀을 몇 말씩 썼었다고 하네요. 우리 할아버지가 외동아들이고 워낙 늦둥이라서 할머니는 맏며느리라도 완전 어린애에 아씨 대접만 받고, 부엌일은 별로 안 해봤대요. 일제때 증조할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의원은 그 밑에서 일 배우던 친척어른이 이어받으셨고, 아직 젊은 할아버지가 물려받은 재산도 어른들이 관리해서 잘 못 챙기셨는데, 그나마도 대부분 전쟁통에 없어졌다는군요.
3.1운동때 이불장 바닥을 이중으로 만들어서 태극기를 보관해 뒀다가 거리로 나온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재산 일부를 금괴로 바꿔서 만주 독립군한테 보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아버지가 그분을 독립유공자 신청을 해볼까 했는데, 경성 한복판에서 제법 유명한 부잣집이다 보니까 일제 관리들이나 헌병들한테 적당히 대접도 해야 했다는 할머니 얘기를 듣고 괜히 친일했다는 소리 들을까봐 포기하셨답니다.
한편 저희 아버지는 김신조 일당 내려왔을 때 군대에서 말년 병장이셨답니다. 한겨울 내무반에서 말년 병장의 잠자리는 빼치카 옆의 가장 따뜻한 자리였대요. 그래서 겨울에도 잘 때는 내의를 벗고 자도 괜찮았다는군요.
그날도 빼치카 옆에서 자다가 새벽에 비상이 걸리길래, 또 훈련상황이겠거니, 대충 군장 챙겨서 나갔다가 인원점검만 하고 다시 들여보내겠지, 하는 생각으로 내의도 제대로 안 챙겨입고 슬렁슬렁 나갔는데, 느닷없이 실탄을 지급하더니, 그 길로 며칠 밤낮을 산속을 헤매 다니느라 쫄따구들보다 훨씬 더 고생하셨다고 합니다.
우리 외할머니 사촌언니가 유관순이었어요..
제 고향이 천안인데.. 외할머니가 병천 토박이세요..(유관순 고향도 천안 병천..)
그 때 얘기 해달라고 조르니까 너무 어려서 잘 기억이 안나고, 등에 한번 업혔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얘기 친구들한테 해주면 잘 안믿더라고요 ㅎㅎ
댓글 달아준 분들 다들 고생은 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얘기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나의 할아버지는...
왜정때 (당신의 표현은 "왜정"이었음!!) 강제로 노역에 끌려갔는데
배에 태워지기 이전에 친구들과 탈출계획을 세우고 있을 무렵
한무리가 탈출하다 전원 사살당했다고...
그 이후 겁먹은 조선인들이 탈출을 하지 않을 것이라 방심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
증조부께서 젊어 급사하시고, 가문이 몰락한 상태에서 왜정을 맞은 할아버지로서는
고난과 역경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하지만,
목숨이 걸린 일생일대의 사건은 이 때가 가장 강렬한 기억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돌아가신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네...
조낸 뒷북이긴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북한에서 사시다가 광복 후 공산당이랑 소련애들이 깽판치는게 싫어서 남쪽으로
내려오셨답니다. 그리고 그 얼마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군에 입대해서 싸우셨다더군요. 그때 전공으로
국가유공자로도 선정되셨구요. 전쟁이 끝난 후엔 계속 군인으로 계시다가 전역하셔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사셨습니다. 근데 군인으로 복무한 기간이 어느 정도 이상만 되면 군인연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할아버지 께서는 거기서 딱 1년이 모자라게 복무하셨다더군요. 그래서 가끔씩 농담으로 '조금만 더 참다
나왔으면 좋았을걸'이라고 이야기 하신답니다.
늦었지만 2010년 새덧글로 달아봅니다.
저희 집은 친할아버지는 6.25 당시 징용을 피해서 북한에서 내려오셨고,
외할아버지는 남한군으로 6.25에 참전하셔서 한쪽 눈을 잃으셨습니다.(유공자심)
그런데도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하셨다는게 대단.. 한건가? ^^;
뭐 친할아버지가 북한군은 아니었지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띠동갑이신데 (결혼 당시 18세-30세)
할머니 말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고 남자가 없어서였다고;
아쉬웠던 기억은 덕분에 집에 족보가 없어서 이거 관련한 숙제나, 사람들이 물어볼때 곤란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잘 모르셨거든요. 전주 이씨라는 거 말고는.
몇대 손이냐 이런거 물어볼 때마다 참..
이 나이에 모른다고 하기도 그렇고, 사정 이야기하도 그렇고;;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유공자인 걸로는 대학 갈 때 아무 혜택이 없더군요.. 쩝.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
집안이 부산토박이라 전쟁에 관한 건 거의 들은게 없고
아버지가 박정희 시절에 군복무를 전경에서 했는데 그때 군대는 다들 배고프고 짬밥도 쓰레기 똥국 수준이었지만 아버지가 복무하던 부대는 대통령을 호위해야 된다 그래서 매일매일 빵 나오고 닭백숙 나오고 장난이 아니었답니다. 전투력 유지해야 된다고 빵 나오면 그 날 안에 무조건 다 먹어치워야 했는데 그래서 부대에 산더미 같은 빵이 전부 이등병들 몫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배고프던 시절에 아버지 부대에서는 질린다고 빵을 안먹었답니다...지금도 전경들한테 곧잘 빵 배급 나오는 모양인데..아마 그 시절과 의미는 다르겠지만요.
당시에는 군대도 지역감정이 심해서 장난이 아니었다고 함. 계급 문제를 초월해서 지역별로 소대가 분열했다고 합니다. 해태랑 롯데랑 야구 경기하는데 그걸로 전라도 선임병이 경상도 후임들을 갈구자 중간 계급이었던 아버지가 들고 일어서서 싸우고 그게 커져서 결국 소대 전체가 패싸움을 벌였다고 함. 당시 아버지는 그 전라도 선임한테 맞아서 이가 다 부러지고 잇몸이 터져 나가서 결국 젊은 나이부터 틀니를 하셨다고 합니다.
또 당시에 전투력 키운다고 무조건 권투를 시키는데 이게 체계적으로 가르치는게 아니라 그냥 무식하게 두들겨패고 밟는거라 어느날 맞고 쓰러져서 뇌막염? 인가가 와서 죽을 뻔했는데 당시에는 이게 불치병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근데 신약이 나와서 타이밍 좋게 살았다고....
당시 군대동기였던 아저씨랑 계속 동업을 하고 있는데 제가 가끔 볼 때마다 아저씨가 그러심..[너네 아버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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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달아 주세요
으아아악....ㅠㅠㅠㅠ 너무해!!!
4주후에 뵙겠습니다.
오옷, 1등?!
orz 그래도 재밌네요 ㅎㅎ
아내 「우리 깨자?! 응?」
남편 「헐 님아, 굽신굽신」
이런 걸 보면
나는 결혼하면 안그럴것 같다는 생각이 항상 드는데,
과연 나도 안그럴까?
어떻게 생각해?
저런 걸 보면
나는 저런 사람과 결혼하지 않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항상 드는데,
과연 저도 안그럴까요...?
군대가면 이런게 있죠
이등병 : "나는 병장되면 절대! 안저럴꺼야!"
↓
병장진급 : "아 뭐 어쩌라고 병신아 내가 그딴거 까지 신경써야 겠어? 애들 관리 안하나? 주절주절"
유명한 말이 있잖습니까..
화장실 들어갈때와 나올때 마음이 다르다고..
웃었다,
남편 「오늘은 내 생일이니 나 대신 회사 나가서 일좀 해줘.」
파닥파닥
내일 니가 가
뭐.....당연한 이야길 가지고 참....(응??)
"내 일 니가 해"인지
"내일 니가 해"인지
헷갈리네요?OTL 한국어로 보면 말장난이 되어버리는데 원문은 뭐였습니까...
뭔 소리이신지..
아내가 "오늘"이 생일이니까 일 대신 해달라고 부탁하니까(생일인만큼
존중받고 싶다)
그럼 내일은 생일이 아니니 내일 그냥 니가 하라는 그런 개그인데...
빨래는 내가 해줄테니까 대신 내 일은 네가 해줘 이런 뜻이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 아내는 오늘 자신의 생일이니까 나는 쉬겠다. 그러니 니가 오늘 내 일좀 대신 해라. 이런 거였는데..
남편은 아 그럼 오늘은 쉬고, 내일 몰아서 해. 라는 거죠
이게 설명이 필요합니까???
이나라 교육수준이 점점 저질화되어가는건가..
어떻게 이런것도 헷갈려하는 한심한 난독증환자들이 있지?
나름 농담인데, 댓글들 참 너무하시네요.
바보다, 저 남자는...
저럴때 마누라를 잘 받들어 모셔줘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이 왔을 때 다양한 것을 시키는 거다.
일단 메이드복부터 구입해 놓으라고..
ㅋ 맞죠.. 생일날 한번 잘 받들어 모셔드리면 다음 기념일까지 편안~~~
더불어 명품가방 정도아니면 볼수없는 가슴애교 서비스 및 누드 앞치마 서비스...-_-;; 난 왜 이런게 좋냐..
ㅋ 맞죠.. 생일날 한번 잘 받들어 모셔드리면 다음 기념일까지 편안~~~
더불어 명품가방 정도아니면 볼수없는 가슴애교 서비스 및 누드 앞치마 서비스...-_-;; 난 왜 이런게 좋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