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았는데 아이의 아침 식사는 나오는데, 내 몫이 나오지 않는다.
혹시 나는 이미 죽은 것이고, 아내에게는 내가 안보이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여러가지 잘못한 일을 빨리 사과해야할까.
* 이번 이야기는 2ch의 VIP게시판 이야기가 아니라 , 근현대사 게시판의 이야기입니다.
1
너희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들은, 리얼한 실제역사를
모두에게 들려주기 위한 게시물.
역사상의 유명인과의 접촉
역사상 중요한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
조상님이 영웅인데, 그 가족만 아는 이야기
그 외, 아무래도 좋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좀 써 줘.
개인적으로는 일본개항부터 러일 전쟁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11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의 돌아가신 할머니는, 젊었을 무렵 도쿄 긴자에서 밀크 셰이크를
처음 마셔보고 세상에 이런 맛있는 것이 있다니, 하고 생각하셨다고w
13
다이쇼 후반부터 쇼와 초기 시대 이야기이지만, 우리 증조 할머니는 소학교를 졸업한 후, 현지의
현립 공업학교에서 자동방적기를 배우면서 일했는데, 당시로서는 무척 중요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소학교 교장과 같은 수준의 급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몇 달에 한번씩 친척들에게 집과 땅을 사줬다고. 그 무렵 나이가 13세 즈음이셨다고 하니까,
지금 시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지.
16
그러고 보면, 증조 할머니의 증조 할아버지 or 할아버지는, 도쿠가와 막부의 낚시, 사냥을
안내하는 수행원이셨대. 그 대가로 도쿠가와 가문의 아욱문장이 들어간 칼이나 옷같은 것을
선물로 종종 받았다고.
한번은 친척 애가 학교에서 싸움이 났을 때 그 칼을 가지고 보복하러 간 적도 있다고w
쇼와 시대에 건달이었던 사촌 어르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갖고 다녔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여튼 지금보다는 법률이 느슨했던 것 같다.
17
>>16
진짜 도쿠가와 가문의 칼이라면 대단하다
그거 지금은 중요문화재 아니야?
19
>>17
그럴까?
10개 쯤 있었다고 하니까, 보검같은 것은 아니고 흔히 선물로 내리던 물건이 아닐까?
하나는 아직도 외가에 있는 것 같지만, 나머지는 전쟁 때 공출당한 것 같아.
다른 물건들은, 다락방에 쌓아두었는데 태풍이 불어 지붕째로 날아가는 바람에 다 잃어버렸다고w
일단 내년에는 외가에 돈을 싸들고 가서 그 칼을 받아올까,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w
37
할머니가, 고조 할머니로부터 들은 러일전쟁 이야기입니다만
고조 할머니는 당시 일본이 러시아에게 이길 전망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셨다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긴 것은 도고 제독 덕분이라고...
38
당시의 일반 서민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굉장히
흥미가 있었는데, 이 게시물 방향성 좋다.
39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자폭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44
우리 할아버지는 시베리아로 끌려갔지만 생환하셨다.
할머니는 공습으로 폭탄이 떨어지길래 죽겠거니, 생각했는데
그 폭탄이 뒷간에 떨어지는 바람이 불발되었다고.
48
다이쇼 시대, 할머니의 할아버지는 공무원이었는데 퇴직금으로 말 한 마리을 받았다고.
그런데 매우 영리한 말이라서 농사 일을 하다 곧잘 탈주했지만 저녁 밥 먹을 때면
꼭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5
>>48
웃기다wwwwww
한가로워w
113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노몬한에 끌려가셔서(역주:1939년 일본-소련 간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
당시 장비가 열악했던 일본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바 있습니다)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돌아
오셨지만... 지금은 소련 측의 자료가 공개되어 쌍방이 모두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왔지만..
당사자로서 느낀 것은,
「이만큼이나 장비에 차이가 있으면 절대 이길 수 없어....」
115
내가 10살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러일전쟁 개전시 도쿄에서 학도군으로 출병, 랴오양, 심양에서
싸우셨다고. 대학 동기들도 많이 지원했지만, 뤼순공격 당시 거의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무리한 공격을 지시한 노기 대장 때문에 좋은 놈들이 많이 죽었다」라며 평생 그를 싫어하셨다.
육군소속이었음에도 해군의 도고 제독을 신처럼 우러러봤고, 심지어 거실에는 그의 사진을 걸어놓으셨을
정도.
태평양 전쟁 때는「도조 히데키같은 미치광이가 일으킨 전쟁, 절대 이길 수 없다」라고 공언하고,
선거에서 전쟁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후보를 응원하거나 자유주의자를 집에 숨겨주거나 했기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고 사복경찰관이 집 근처를 서성이기도 했다고. 만약 재향군인회의 임원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체포되었을 거라고 한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에는 도리어 재향군인회 임원이었던 사실이 문제가 되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셨다.
「모처럼 전쟁이 끝났는데, 한창 때의 특별 고등경찰들보다도 이 빨갱이들이 더 지독하다」
라며 한탄을 많이 하셨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다시 공산주의 세력이
몰락하고 외할아버지가 다시 마을유지로서 힘을 갖게 되셨다고.
119
다이쇼 시대에 태어난, 돌아가신 할머니는 오사카 중심부에 거주하셨던 초 명문가 아가씨.
다카라즈카 연극을 매일같이 구경하고, 고베의 외국인이 경영하는 케이크 상점이나 초콜릿
가게에 쇼핑을 다니셨다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별장으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스키야키나 아이스크림을 부족함 없이
드셨다고 하고, 남동생은 집에 있는 설탕이나 물엿으로, 그걸 미끼로 무수한 여자들을 헌팅
하고 다녔다고 하고...
거의 현대와 다름 없는 높은 문화수준을 향유하셨지만,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도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대해 '일본과 같은 편'이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훌륭한 사람이라 옹호한 것에서,
시대를 느낀다.
145
우리 할머니는 91세이신데,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와 만났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 할머니가 다니던 여학교에 왔는데, 학생대표로 할머니가「각하, 휘호를
남겨주세요」라고 하자, 아무 말 없이 멋진 필체로 글을 남겨주었다고. 그건 아직도 학교에
남아있다고 한다.
뭔가 한 말씀 하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아서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귀가 안 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하는데,「휘호를 남겨주세요」라는 말에 곧바로 글을 써주었다는 점에서, 장애는
아니었라고.
235
우리 할아버지.
젊으셨을 때, 혼다 소이치로(역주:대기업 HONDA의 창립자)와 아는 사이셨는데,
혼다 소이치로가 처음 오토바이 가게를 시작할 때「함께 하지 않겠는가?」 하고
권유를 받았지만 돈이 안 될 것 같아서 거절하셨다고.
아아, 할아버지! 보는 눈이 너무 없으셨어요!!
237
>>235
당시 혼다는 인근(아카사카?)에서는「속도광」수준으로, 조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던 것 같아. 무리도 아니야.
247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할아버지나 증조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 '일본근대문학의 어머니' 요사노 아키코씨의 옆집에
살았는데, 요사노 아키코는 당시 인근에서는「그 애랑 놀면 안 돼!」라고 일컬어졌다고 한다.
불량녀였던 것 같다.
250
>>247
뭐,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무렵에 연애 결혼은 불건전한 일이었다고. 그 시절부터 자유분방한 성향을
보인 그녀니까, 그런 만큼 아무래도 평이 좋을 수는 없었겠지
252
우리 할아버지는 관동군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돌아온 것이 쇼와 24년(1949년).
그 때 우리 아버지는 5살로, 사진으로 밖에 자신의 아버지를 몰랐으니까 사진과 다르게 변해 버린 할아
버지를 처음 보고「아빠왔다」라는 말을 들어도 전혀 실감이 없고 낯선 아저씨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망
쳐버렸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괴로우셨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는 전원이 영양실조로, 매일같이 전우가 죽었다고 한다. 어젯 밤「잘 자라」,
라고 했던 동료가, 아침이 되면 죽어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간다!」라고 계속 강하게 다짐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라고. 8년 전에 돌아가실 때까지 러시아인들을 저주하셨고, 심지어 돌아가실 때 남긴 유언마저
「러시아 놈들만큼은 믿지마라」였다.
597
증조 할머니가 어렸을 적, 자주 집의 근처를 야마모토 곤베에(역주:러일전쟁 당시의 해군제독이자
총리를 2번이나 역임한 인물)가 출근용 마차를 타고 지나다니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린 증조 할머니가「곤베씨!」하고 부르면, 서민이 부른 것이었음에도「네!」하고 대답하며
마차에서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고 한다.
599
>>597
이 이야기, 사실이라면 이 게시물의 이야기 중에서 제일 레벨 높지 않아?
당시 최고 권력자와 접했을 뿐 아니라 그 익살맞은 평소 모습까지 엿본 셈이니까···
823
우리 할아버지도 시베리아 억류 경험자.
시베리아 억류의 비참한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할아버지에게 물어봤지만,
「러시아인은 상냥했다」라는 전혀 예상 외의 대답이 왔다.
할아버지 가라사대, 러시아 병사들은 잔반도 잘 줬고, 그래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정말 좀 황당한 야기이지만, 할아버지는 어쨌든 살아서 귀환할 수 있었다는 자체에 감사
하고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이외에도, 강제노역으로 농사가 끝난 후 수확한
감사가 한 명당 2개씩 배부되어 그것으로 떡을 지어 먹었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 뿐이었다.
827
>>823
전쟁 종군기록같은 것을 봐도,
소련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사람조차도 러시아 사람은 뜻밖에
상냥했다는 기록은 쉽게 발견할 수 있어. 대개는 음식관련 이야기지만...
그리고, 포로를 폭행한 소련 장교가 이등병으로 격하된 이야기 등, 일본군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도 종종 있었다고.
전파만세 - 리라하우스 제 3별관 의 역사와 서민들의 이야기 에서 트랙백 할아버지가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가신 적이 있다는 것은 어릴 때 부터 알고 있었지만 일종의 참전자라는 ..
역사와 서민들의 이야기 .....수집하면 꽤 재밌을 것 같은데 연구비 대주려나요 (어이)
http://newkoman.mireene.com/tt/1718 리라하우스는 아시는 분들은 아실테고, 모르는 분은 모르실겁니다. 2ch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번역해서 올려두시길래 가끔 가봤다가 얼마간 안갔는데.. 지..
소련병사가 상냥했다라... 개인성이거나... 의외로 '제국주의자들에게 희생된 같은 프롤레타리아'라고 잘해준 사람도 있었을지도.
순전히 추측이지만... 실제로 어떠했다는 건 접어두고, 장차 혁명으로 전세계 억압받는 인민을 해방하겠다는 국가적 사명을 안고 어떤 '도덕적 비교우위'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테니 포로대우에도 정책적으로 그런 면도 있을 수 있겠네요. 중국 사회주의 정권이 인권은 개판인데 남녀평등에는 졸라 관심을 쏟았다는 식.
물론 독일군에게는 전혀 아니었겠죠.
재밌네요 ㅋㅋㅋ 정말 알고 있는 얘기가 있다면 한마디씩 써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일단 저는...
1905년생인 증조할머니가 고종을 실제로 뵌 적이 있으시데요.
울집이 전주 이씨 가문이라서 전주 이씨 집성촌에 살고 있거든요. 지금도 마을 주민의 반 이상이 전주 이씨구요.
조선 후기 국정이 문란할때(아마도 철종 즉위 무렵이라는 듯 해요) 서울에서 사람이 와서 왕위에 오를 만한 사람이 있나 찾으러 왔다는 얘길 들었어요. 참고로 고향집은 전북 김제 ㄷㄷㄷㄷ 한때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었지만 세종의 넷째 아들이었던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사는 동네였던데다가(즉 왕위 계승 순위에서는 멀고 먼 친척들) 지금도 서울에서 김제까지 버스로만 3시간 걸리는데 그 당시 우리 동네까지 왔었다는 건...역시 조선 후기 사회가 얼마나 혼란의 도가니였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의 단면이겠지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는 대학가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을때
그런거에 아무 관심도 없으셨고 단정한 머리에다가
갈색 잠바같은걸 주로 입고 다니셔서
운동권 학생들이 저희 아버지가 눈에 띄면
"짭새다"라고 하면서 도망갔다는 일화가...
...나의 할아버지의 엄청 오래전 조상은..........
원숭이다. 나무에서 바나나를 따먹으셨지
그분은 바나나를 먹다 질려 땅으로 내려와 바닥에 흰개미를 잡아 먹기를 했는데
그때 흰개미를 잡을려고 손을 많이 쓰다보니 저절로 지능이 발달되었고 대가리가 조낸 커지면서
몸퉁이 털이 다 빠지고...어느샌가 뒤돌아 보니 꼬리가 짤려 있었데.
할아버지가 제모를 할줄은 몰랐어. 정말 위대하신 분이야.
얼마전에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이북에선 집안이 방귀 꽤나 뀌는 집안 이었다네요.
그냥 재산이 많은게 아니라 학식있는 의사집안이었다네요-.-;
게다가 처가는 [장씨네 땅 안밟고 못돌아다닌다]소리가
나올 정도로 큰 지주였나본데 역시나 해방후 소련군 진주하면서 캐몰락(..)
그런데 할아버지 말씀 들어보면 남들처럼 비장한 각오로 고향과 재산 버리고 삼팔선을 넘으신게 아니라
갖 결혼해서 할아버지 횽님이 하는 의원일이 너무 힘들어서 아내랑같이 서울로 핑계대고 도망쳐
나오셨다던데;; 6.25크리 맞으셔서 졸지에 실향민이 되셨다는-.-;;;
제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는 섬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일제시대때 순사(정말 순사임, 박순사라고...)가 한명 있었는데
술먹고 잠든 노인을 집에 데려다 주는등 평가가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
제 아버지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군생활을 하셨는데
당시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어떤 분(화려한 휴가로 유명함)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당시 '초 비상사태(북한이 아니라 쿠데타니까)'
였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안 물어봤음
우리 할아버지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6.25때 고향에서 징집되셨는데
당시 영어를 조금 일찍, 열심히 배워두신 덕분에
미군부대 관련 행정직으로 빠지셨다고..
덕분에 이런저런 보급물자를 나눠받아서 살림에도 보태시다가
1.4 후퇴 즈음에, 그때까지 계속 동행하신 할머니께서
'느낌이 좋지 않다'는, 미묘한 육감을 발휘하셔서
그간 가지고 있던 개인물품과 봉급을 챙겨서 도망나오셨다고 합니다.
부대에 남아계셨다면 중공군에 휩쓸려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그런데 이 덕분에 군적이 제대로 남아있질 않아서 군대에 2번 다녀오셨던 ㅠㅠㅠㅜㅠㅜㅠㅜㅠㅜㅠㅜ
지못미 할아버지
저기 시베리아이야기는 저희 외할아버지 이야기로는 당시 소련이 다민족국가여서 출신성분마다 행동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일례로 어디쪽 출신군인은 상냥하게 대해주는데 다른쪽은 아무말도없이 손을 내밀면 뭐라도 줘야했고 안주면 그자리에서 죽이는 악랄한 행동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실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군시절에 장난삼아 팔뚝에 새겨둔 문신 (유치하게도 'love') 때문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실뻔 했다더군요
뭐 지금 서른 안팎인 사람들만 해도 소위 '전땡뉴스'를 어린시절에 체험하고 살아온 사람들이죠....
저희 작은증조할아버지?께서는 독립운동가.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무려 와세다대학에 유학을 가셨다가
현지 징집;;되어 졸지에 일본군이 되셨!?.....그래서 집 분위기가 초큼 좋지 않았더랩니다.
나름 그 지역 유지 축에 들었던지라 고이 자란 할아버지께선 책만 읽을 줄 아시고 별반 할 줄 아는 것도 없으셔서 걍 분위기상 일본군으로 참가한 것 같긴 한데....-0-;;
아 그러고보니 할아버지께서 만주 치러 가셨을 때(?)...거 누구더라 유명하신 장군...김좌진?암튼 그때 돌아 오시면서 호랭이를 생짜배기로 잡아오셔갖구 그 가죽으로 베낭을;;;;만드셨대요.
근데 625크리 터지고 나서 피난한 사이에 할아버지 댁이 제일 크다는 이유로 적군의 진지가 되었고,
전쟁 끝나고 고향에 다시 돌아와 보니 그 호랑이 베낭이 없어졌더랩니다.
누가 훔쳐갔나봐요. 아 아까워 ㅅㅂ 꿈...
엄마의 고모할머니는 이북과 남한의 경계쯤의 부잣집에 사셨는데
이 분의 사고방식은 인간은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
근데 남한군이 밥을 얻어먹을 때는 안방까지 쳐들어와서 밥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릴 질러서 벌벌 떨면서 밥을 먹여 보냈는데,북한군이 얻어먹으러 오면 졸병들은 집 밖에 대기하고 대장만 마당에 들어와서 식사 좀 얻어먹겠습니다 하고 부탁하더래요.
고모할머니 왈,"남한 선전 다 거짓말이다.남한군은 상놈이고 북한군은 양반이여."
어린 저는 그런가보다..했는데,아빠의 해석이 멋지더군요.
아빠 왈,"역시 남침이 아니라 북침(북한이 먼저 침략)이 맞구나.
급히 짜여진 오합지졸 남한군에 비해, 북한군은 준비되고 잘 훈련된 병사였어."
북한에 의한 6. 25 남침입니다. 정설은 북한이 남한을 침범해서 남침이고, 일부 학자들이 남한이 북한을 먼저 쳤다고 주장하면서 북침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죠.
별 얘긴 아니지만 저도 한번.
아버지 고향이 지리산 바로 근처 시골이예요.
정확히 몇년도인지는 모르겠는데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소위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을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불러모와서 총으로 쏴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 친척 중에는 해를 당한 사람이 없었는데(8촌쯤 되는 친척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그 당시 시골 마을이란 마을끼리 다 알고 지내고 그렇잖아요. 가까운 동네 아저씨, 같은 분들도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도 가끔 고향 누구네 집 삼촌이 그때 죽었다 이런 이야기 하셨고요. 그래서 아직도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대요.
저도 뭐 대단한 이야기들은 없고
할머니 이야기를 어릴때 몇가지 들었는데
할머니께 오라버니가 몇분[세네분? 기억이 잘;;] 계셨는데 그 중에 한분은 국군이 되시고 한분은 북한의 인민군이 되셨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인민군이 되셨다는 오빠분이 그 당시 워낙 머리가 좋고 영특해서, 공산주의에 빠져들지 않았나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튼 전쟁으로 인해 두분 다 돌아가신 것 같다고 그러시고, 할머니쪽에 그런 분이 계셔서 저희 아버지의 형제들은 사관학교를 가려고 하셔도 갈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뭐 그것도 10년 지나지 않아 괜찮아 진 것 같지만[막내삼촌은 ROTC 복무하시다 장교로 군입대 하셨으니;]
뭐랄까 굉장히 씁쓸하면서 안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한번 들었을 뿐인데 아직도 기억나네요.
우리는... 별거 없어요.
그저 외할머니 쪽이 625때 북한에서 내려왔다는 정도...
모두 무사히 내려와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TV감 되었을지도.
그럼 전 영원한 잠수의 세계로...Zzz
방금 할아버지한테 여쭤봣는데,
6.25때 인민군이 와서 노동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주로 땅파는 것....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아시는 어떤 분은 일제시대 때 부산 살다가 섬으로 갔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인육(사람을 죽여서)을 드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예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맛이 어땠는지는 말 안해줫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 본 어떤 할아버지는 예전 6.25 때는 자기 아는 사람이 인민군의
납탄에 죽었는데 저격을 할때에는 총쏘는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맞추기 어려운데 총쏘는 사람 윗쪽에
있는 사람은 맞추기(겨냥하고 조준하는 것) 쉬어서 어떤 사람은 인민군이 오자 산 위로 도망을 갔다가
총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영화 대부(1972)에서 경찰관이 계단으로 도망쳐 올라가는 사람을 총으로 조준해서 저격하는게 생각나는군요.
(지금부터는 정말로 사실이 아님)참고로 고기는 칼로 찣어서 먹여야지, 총에 맞아죽은 건 총알을 빼내도 화약때문에
고기맛을 버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쓰던 기관단총은 총알이 관통하지 않고 박혀 있기 때문에 고기먹을 때 먹기 어렵다고 합니다. 게다가 자동 사격이라서 총알이 너무 박혀서 피 색깔도 이상하고 아무튼 안 좋다고 합니다.
그래도 총상 때문에 형체가 알아보기 어려운 건 먹기가 쉬웠다고 합니다. 형체가 온전한 건 먹기가 어려웠다는 군요. (고기가 어떤 고기인지는 알아서 상상하시길)
그리고 사람을 죽일때는 아무리 훈련을 많이 받았어도 처음으로 사람 죽일때는 망설여진다고 합니다. 그럴때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나 동물로 생각해버리면 쉽게 죽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타자화'시키는 것)
군대에서 "우리의 주적은 xx라고 교육시키는 이유는 목적의식을 가지게 함으로써 전투피로증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할머니 세대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희 외가는 광주 출신입니다. 그 전땡 아저씨가 집권할 무렵은 정말 흉흉했다나봐요. 거리에서 사람 후려쳐서 끌고가는 사태가 수두룩했다 그러더라구요. 저희 어머니는 광주민주화항쟁때 고등학생이었는데,큰 조카를 등에 업고 거리를 가다가 총소리가 들려서 근처에 있던 손수레 안에 조카를 집어넣고 몸으로 막았대요. 어떻게든 이 애는 살려야한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그 후에 할머니가 무슨 일 일어날지 모른다고 엄마를 집에 가둬두다시피 하셨다더군요.
전화같은 것도 안되고,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어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다나봐요. 시민군이 일어난 후에도 일반 시민들은 그게 자칫 폭동이 될까봐 걱정했다니 정말 순박했죠; 그래도 사람들끼리 쌀이나 김치 모아서 시민군 주고 그랬나봐요. 시민군 사람들도 무기 들었으니까 자칫 험악해질까봐 엄청 조심하면서 돌아다녔대요.
그리고 막내 삼촌은 서울에 있어서 휘말리는 일은 없었는데(평소 엄청 드센 성격이라 있었으면 시민군 참전했을 거라고 할머니가 욕;하시더군요, 실제로 삼촌 친구분들은 그 때 많이 돌아가셨대요) 광주사태 이후로 군대갔다가 '빨갱이들 들어와서 군대 뺑이치게 만든; 광주출신'이라고 엄청 텃세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깔이 엄청난-_-; 분이라서 삐딱선 타고 들어오는 텃세에는 일일히 맞대응해서 결국 상대쪽에서 빌고 들어왔다고..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 고생하셨을 것같지만 그 이야기는 안해주시더라구요.
덧붙여서 당시 서울 사시던 아버지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 몰랐대요. 모든 매스미디어가 완전히 차단되서 광주 이외 지역 사람들은 정말 북한 간첩사태인줄 알았다더라구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지금도 매스미디어 안믿으십니다-_-; 가끔 아버지가 인터넷만 됐어도 전x이 그 짓 못했을 거라 그러시죠.
아, 할머니 이야기.
일제 시대때 창씨개명있잖아요. 저희 할머니도 그거 하셨는데 당시 마을 풍조는 별로 큰 의미없이 '나라에서 하라니까'하고 하는 분위기였대요. 단 개명까진 좋은데 실제로 그걸로 부르고 다니는 경우가 없었다고-_-; <슈후쿠던가 오후쿠던가 암튼 그거였지>하시는데 너무 여유로운 분위기라 듣던 손녀는 벙..;
그리고 할아버지는 당시로는 말도 못할 장신에 굉장한 신식 멋쟁이셨다고. (제 어머니가 세살 때 돌아가셔서 저는 얼굴도 모르지만 단지 결혼한 후에도 맨날 뭐 만든답시고 앉아서 빈둥거리는 게 속터져서 한번은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구상한 것들을 죄다 태워버리셨대요. 그 만들던게 "모를 자동으로 심어주는 기계(...)"였다고(....)나중에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런 기계가 정말 나와서 그 사람이 앞서가는 인간이긴 했구나 싶었대요. ...그거 안 태웠으면 지금쯤..OTL
아, 하나더. 전땡아저씨가 있을 때,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날때 이야깁니다.
그때 대학생들이 시위를 할 때, 앞에는 체육계(흔히 말하는 떡대 좋은) 학생들이 서로서로 팔짱끼고 앞으로 앞으로 주도적으로 나가고, 뒤에서는 다른 대학생들이 뒤를 따라가며 시위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시위를 하니 진압이 시작되었는데 진압이 시작되니까 이게 대열이 흐트러졌다고 하더군요. 대열이 흐트러져서 모두 도망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군대와 경찰을 피해서 도망가고, 뒤에서는 경찰이 쫓아오는데 그때 어느 덩치 좋은(체육계)남성이 어느 여성분을 구해줬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둘은 눈이 맞아서 제 친구 부모님이 되셨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우리집 이야기 하나 더.
우리 할아버지는 서자출신(그것도 셋째 부인, 즉 둘째첩ㅠㅠ 의 아들;. 그런데 증조할머니는 또 초혼도 아니셨다고. 우리 증조할아버지 대체 뭐하시던 분인지 좀 의심감....-ㅂ-;;;
큰할배네(...즉 적장자;; 사는걸로 봐선 오지게 부잣집이었던 거 같긴 한데, 서자한테 돌아올 재산따위 개뿔 없기에 할아버지는 배를 타셨다네요. 그래서 저희 할아버지 직업은 간지나는 마도로스+_+ 그 시절에 필리핀, 미국, 인도 가보신 분 흔치 않으셨을겝니다. 하지만 저희 할머니는 덕분에 반 과부 신세....ㅠㅠ 일년에 두 번이나 보셨을까요. 할아버지가 젊어서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저희 아버지를 비롯해 고모들, 작은아버지가 태어난게 신기할 정도.
어쨌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귀국하실 때마다 진귀한 선물(...)을 받으셨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굵기가 거의 허벅지 정도로 튼실한 살라미 소세지, 인도 사라사, 마카오 빨간 우단 등등.... 그래서 할아버지 살아계시던 시절에는 패션 리더셨다고. 인도 사라사로 만든 한복이라니, 이거 멋지잖아요 -_ㅠb
아, 그리고 소세지는 숭덩숭덩 썰어서 김치넣고 지져 드셨대요....=ㅂ=;;; 맛있으셨다고. 요새도 부대찌개 꽤나 좋아하십니다 ㅋㅋㅋ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먼 과거의 일도 아닙니다. ^^ 제가 유치원 다닐 때 광주에서 '그' 일이 벌어졌었지요.
당시 법원에서 도청 가는 길목(그 사이에 조선대가 있습니다)에서 살았었는데, 아침에 유치원 가려고 나서는데 군인들하고 탱크(^^;;;;가 지나가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엄마 탱크 지나가, 그랬더니 오늘은 안가도 되는 날이라고 말씀하셨었지요. ^^ 지금 생각해 보면 장갑차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지만 그 때는 그냥 다 탱크... ^^
제 여동생은 당시 3살, 아버지께서 업고 옥상에 올라가 계셨는데, 동네 뒷산(지금은 시립도서관이 지어져 있습니다)으로 총을 둘러멘 사람들이 거적대기 같은 걸 메고 올라가는 걸 보고 총 맞을까봐 무서워서 내려오셨다는말씀도 하셨지요. 아마 당시 진압군이었던듯..
할아버지는 지주셨는데 외할머니는 지리산 빨치산 출신입니다. ^^;;; 외할머니께선 산에서 내려오신 뒤에 할아버지네 댁에서 소작농을 하셨는데 아버지께서 소작농의 딸에 필이 꽂혀서 결혼하신 것.. ^^;;; 외할머니께서는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시지요. 온 몸 여기 저기에 흉터가 많습니다... 이념의 시대에 참 불행한 일들이 많았었지요...
할아버지,할머니께선 창시개명했다는데 격렬한 반대 이런거 없이 위에서 시키니깐 그냥 그러러니 하고 쓰다가 넘어갔답니다.
외할머니께선 학교를 일제때 다녔으니 일본어를 좀 아셨죠. 그래서 어머니도 외할머니께 좀 배우셨고...
그러고 보니 우리집에 파란만장한 가족사는 없군요.
다만 농촌이라 일본에서 쌀 수탈로 쌀밥은 커녕 굶는게 일상이였다 정도네요.
6.25때는 근처에 산이 있는것도 아니라서 빨치산은 남에 이야기였고 외할아버지,할아버 모두 상처없이 전쟁에서 무사귀환.
큰아버지는 월남전 참전했는데 요즘에 TV보시고는 교엽제 후유증 없는게 다행이라고 하시네요. 전역하시고는 중동지역가셔서 일도 하셨는데 어릴적에 서랍에서사막사진 보고 신기해했었죠.
생가해보니 평범한 소시민 레벨..
저희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두 분다 6.25 참전 용사셨죠. 그런데 할아버지는 전방에서 고생하셨지만, 외할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나셨는데, 일본에서 중학교를 나오셔서 덕분에 후방으로 빠지셨답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큰아버지 깨서는 좌익 항일운동가셨는데, 해방후인가 전인가 가물하지만, 전라도 해남에 작은학교를 세우셨죠. 하지만 결국 해방후 혼란기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무튼 전쟁후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농사지으시고, 외할아버지는 계속 군인으로 남으시려다가 결국 제대하셨습니다.
첫 째 이모는 광주민주화 운동때 그 현장에 있기도 했네요.
제 고향(어른들 고향)은 경남 의령의 시골인데 625때 마을이 북한군 야전병원이었답니다. 의무대장이 중령 계급이었는데 싹싹하고 인사성 밝고「사람새가 된」군인이었다나.
환자용으로 소를 세 마리 끌고가서 잡아먹었는데 나중에 부대가 철수할 때 어디서 가져왔는지 말을 두 마리 끌고와서 주면서 농민의 전재산인 소를 잡아버려서 미안하다고, 대신 말을 줄테니 이걸로 농사일 하라고.
그래서 마을에 말이 두 마리 있게 됐는데, 젊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마을 앞 방죽을 뛰어다니다가 떨어져 다치기도 하고 했답니다.
그러다 한 마리는 난간 없는 다리 위에서 떨어져 죽고, 한 마리 남았는데 돌아온 경찰지서에서 빨갱이 물건이라고 압수해가고 마을 사람들이 지서에 끌려가서 욕을 많이 치렀다고.
나중에 보니까 그 말을 지서장이 타고 다니더라나.
저희 외할아버지는 강점기 당시에
징용 영장(?) 같은 것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당시 분위기가 징용을 가는 것은 거의 "죽으러 간다"는 느낌이여서
술도 공짜로 먹고 마을 내에서 어느 정도 깽판^^을 치는 것은
다들 눈 감아 주는 분위기 였다는데요..
징용 소집이 있던 날..
날짜도 정확히 기억하십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단 일본군이 항복을 했다는 소문이 들어 오긴 하는데,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확실하게 정보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동네 학교 운동장(소집 장소)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동네 야산에 숨으셨답니다.
일단 눈치 좀 보다가, 출첵하는 분위기면 쫓아 가려고..
근데 참 사람 생각은 다들 비슷한건지,
그날 소집 예정이었던 청년들은 하나도 안모이고,
야산 여기저기서 담배 연기만 보였다고 하시네요..^^
저희 할머니는 6.25때 할머니가 집 건너 우물가에 서있었는데 탱크하고 군용짚차들이 우물하고 집 사이의 길로 다가오기 시작해서 증조할머니가 빨리 건너와! 라고 소리질러서 정신없이 뛰어건너왔더니 그대로 3일내내 그자리에 탱크가 지나가고 결국 얼마 못가서 공습때문에 마을이 완전 쑥대밭이 됐다고 하더라구요 ㅇ<-<
와 그때 할머니가 안뛰어오셨으면 저는 여기서 자판 못치고 있었을듯 ㅇㅇ
그런얘기들 가끔씩 할머니나 할아버지들한테 들을때마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된다고 느낍니다 ㄱ-;;; 정말 중요한 가족들하고 친구들이 그렇게 된다면 으으 생각하는것도 끔찍해요;;
이번 게시물 정말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해주네요 ^3^ 잘봤습니다~ 리라님&댓글달아주신 여러분들 ㅋ
이 게시물의 리플들을 보니 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군요.
우리집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께선 보도연맹에서 주는 쌀을 받으려다가 다 떨어지는 바람에 못 받아서 ㅆㅂㅆㅂ 거리셨는데 몇달뒤 곡식 받은 사람들 죄다 끌려가서 총살당하는걸 보고 ㄷㄷㄷ 거리셨다고 하시더군요.
저희 집은 부산 이라...전쟁 이야기는 없고~ 별다른게 없지만...
이 글타래 재밌네요.
저기 위에 일본 순사 이야기가 나와서말인데요.
몇년전 TV 에서 시골에 있는 할머니가 초등학교은사 (일제시대니깐 소학교 은사)를 찾는데
일본인 선생이더군요 (일본까지 가서 만났습니다.)
칼 차고 수업을 했지만, 교육자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고.
부인은 동네 아낙네들과 같이 일하고... 평판 좋고~
일제시대를 살아온 어르신들은 전부 일본을 증오하리라고 생각했던 저에겐 꽤 충격!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대단한 수재였다고 합니다.(듣기로는ㅡㅡ)
와세다 대학을 나왔는데, 사진으로 본 모습은 말 그대로 지식엘리트 타입.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일본에서 고위 경찰로 재직하면서 재산을 상당히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오자, 재산을 전부 금으로 바꾸어 가방에 넣어 귀국선에 탔다고 합니다.
그 때 귀국선은 완전히 아비규환이었죠... 그걸 견뎌내고 부산에 도착하고 보니.
......없네?
결국 실의에 빠져 동네 애들이나 가르치면서 술로 여생을 보내다 일찍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동안 집안은 완전히 몰락.
열받은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저작들을 몽땅 불태워버리셨다고 하죠.ㅡㅡ
명문가 할머니에 대한 글이 저희 외할머니 이야기랑 비슷하네요.
외할머니는 전국 레벨 재벌가의 딸이셨다고 합니다. 마침 외할머니가 태어나셨을 때 집안이 더 잘 되기 시작해서 복덩이라고 귀여움받았다고 해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치마저고리 입을 때 혼자서 모직 원피스 입고, 간식거리가 귀하던 시절이라서 빵 부스러기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며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학교에 기부도 많이 했는데, 한 번은 피아노를 기부했더니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과 전교생이 외할머니한테 허리숙여 절을 했다고 합니다-_-; 일제시대라서 일본식 감사 인사를 한 거겠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백화점 구경을 다니는 등 한가로운 생활이었지만,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의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불안정하셨다고 하네요. 당시의 여자로서는 드물게 대학교에도 진학을 하셨습니다. 장래희망은 정치가였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가정과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죠.
집안에 배운 사람들이 많아서 집안 전체가 좌파로 기우는 바람에, 6.25 전까지는 외할머니가 여맹(아마 조선민주여성동맹인 것 같습니다) 위원장도 하시고 했지만 6.25 이후로는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거기다 딸이라서 상속을 받지 못했고, 외할아버지도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돈에 집착하시면서 산 것 같아요. 외할아버지 월급이 자기 한 달 용돈도 안 된다고 도망치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리플들 보면 우리집은 뭔가 내세울 이야기가 없는듯......
다행이라면 할머니의 언니(이모할머니)께서는 위안부 대신 공장에서 노역하셨고
할머니께서는 당시 '너무 어려서' 그런데 끌려가시진 않으셨던....
그 이야기 듣곤 가끔 로리로리거리는 사람들 보면 섬짓했던 기억이.....-_-
그 시절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리 성향이 더 강했더라면 어쩔....이런 생각이
뭐 그 외엔
6.25사변때 할아버지께서 다리에 총 맞으신 것 빼곤 무사히 돌아오셨던거하고 (그걸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조금 전에 말씀해주셨던.....ㄷㄷ)
그나마 부산에 좀 갖고 있던 땅을 (뭐 농사용이죠) 김종필쪽 사람한테 뜯긴거 정도
의외로 할머니께서 전땡에 대해선 좀 긍정적으로 말씀하셔서 좀 놀랬,,
물가랑 조폭은 잡아준 덕분에 없는 사람 입장에서 호구하긴 좀 편했다나.....
저희집안 이야기는
정확히는... 언젠지 3번이나 들었는데 가물가물 하지만 저희집은 천주교 구교 집안입니다.
적당히 잘사시던 조상님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200년전에 집안 자체가 -_-;; 완전 풍비박산이 나서 일가가 모조리 몰살당하시고 저희 집안 선조 3분만(당시 9살, 10살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간신히 도망쳐서 마을과 마을 경계에 숨어 사시면서 옹기장이를 하셨다고 하죠.
도망친 3분중(3남매. 두분이 남성 한분이 여성) 두분은 얼마지나지 않아 일찍 돌아가시고 한분만(저희집안 직계선조) 옹기장이를 하면서 박해를 피하고 신앙을 지켜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뒤로 줄곧 저희 집안에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배출되고 지금 글쓰는 저역시 나름 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물론 103위 순교성인에 이름이 올라가있지는 않지만 나름 자랑스럽습니다.
다만 아쉬운것은 현재 저희집안에서 제 대에 이르러서는 신앙 생활하는사람이 거의 없다라는게 ㅠ_ㅠ;;
아... 물론 이 이야기는 성당에서 하지 않아요 -_-;; 이런 말하면 사람들이 괜히 미워함;;
아, 우리 이모할머니께서 전쟁나기 전에 평양에 계시다가 월남하셨는데, 평양에서 김일성 연설하는 걸 실제로 봤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김일성이 너무 어리다고 쑥덕거렸고, 여자들은 김일성이 잘생겼다고 홀라당 다 넘어가고.
지금으로 치면 완전 얼짱이었다대요. 당시 국내 어떤 남자 연예인들이랑 겨뤄놓고 봐도 지지 않는 외모였다고 합니다 - 물론 당시 기준에서.
결국 여자들한테 인기있었던 게 권력의 기반중 하나.
역시 외모 지상주의는 나쁜 결과만을 낳을 뿐이지요.
역시 우리나라는 625를 비롯한 일제때/해방전후 이야기가 많군요.
일종의 사족을 달아보자면...
1. 사실 625 자체가 세계사적으로 손꼽히는 비매너 전쟁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전쟁에서 찾아볼수 없는, 유례없는 학살이나 만행이 정말 많이 벌어졌다 합니다.
(뭐 여기 오는 분들중에서 아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그래서 매너의 순서는 중공군>>미군(+유엔군)>>북괴군>>국군 이었다고 하는군요.
일단 중공군은 굉장히 오랫동안 게릴라전을 하면서 매너가 몸에 밴 지휘관들도 많았고
미군이야 뭐 한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뿐이지 여러모로 매너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괴군도 오랜시간 훈련을 시키면서 "인민의 군대"를 모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민피해를 엄금했답니다. 물론 지역주민들중에 반동을 색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요.
가장 안습은 국군. 상당부분 급조된데다가 우익/극우/친일/파쇼/전향한좌익 가리지않고
한데 어영부영 모여있는 바람에 강한 규율이 아니면 군대 자체가 유지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통제냐 방임이냐에 있어서 어쩔수없이 통제를 택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었던
거죠. 이런 강압적인 군대에 별의별 사람이 다 끼어 있으니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나기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국민방위군 사건, 625 직전의 크고작은 반란사건 등등...).
2. 김일성은 실제로 매우 잘생겼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귀국 직후에 찍은
아직 살도 찌지 않은 슬림한 김일성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해방 후 정치지도자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았던데 비해
30대의 젊은 김일성이 혜성처럼 등장하자 대부분은 새롭고 참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언론이 부풀린 김일성 전설도 대단했죠. 이 부분에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단 만주의 유능한 게릴라 대장 중 한명이었지만 실제 전공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국내 좌파중 가장 인망있던 인물은 여운형이었고, 우파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조만식 선생이었으나
김일성은 사실 소련의 덕을 많이 받은 케이스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안습의 캐릭터인 박헌영에 비교하면 천하를 얻은거나 마찬가지죠.
보도연맹 이야기 나오니 한가지 더 생각이 났습니다.
위의 군대 두 번 다녀오신 할아버지.. 의 사촌 되시는 분들은
당시 그럭저럭 지주층에 속하는 분이셨는데
전쟁발발 전후로, 매일 얼굴보고 지냈던 마을 사람들부터
재산의 분배상태에 불만을 가졌던 일가친척들..까지
프로파겐다에 쩔어 흉흉한 분위기가 멎지 않았다고 하네요
옆마을에선 집에 불을 지르고 집주인을 끌어내
돌로 쳐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다고 하지만
그정도까지는 아니였고..
보도연맹쪽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묘한 소집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전쟁 준비의 일환이었을까요)
매주 주말, 휴일 오전 몇 시에 마을회관에서 종소리가 들리면
준비를 하고 마을회관 앞에 2열종대로 정렬하는 일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발발한 후엔, 관련된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보도연맹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한 국군의 훼이크로 쓰였다고 합니다.
종이 울린 후 모인 사람들을 모두 데려가서, 그대로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 장면으로..
우리 큰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나름 배운축이셔서 초시를 하셨대요..그래서 징용은 패스..근데 외할아버지는 징용끌려가셨다가 탈출해서 생감자 먹으면서 견디시다가 겨우 귀국하셨대요..근데 곧 6.25터져서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 죽였다고 하시대요..외할아버지도 장사하셨는데 마침 인민군 왔을때 딴 동네 가 계셔서 살아남았다고...글고 아버지 고향이 지리산이랑 가까워서 빨치산 색출작업이 대단했다고 하더라고요..그때 빨치산 좀 잡았다 하는 사람들은 권력이 장난 아니었다고 합니다...
둘째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남들은 독립운동이니 뭐니 하는데
혼자 여자애들을 여럿 울리고 다니다가 그만 복상사...
그 바람에 집안이 기울고 할아버지는 일본에 노동하러 갔다가 한국인인 할머니를 만나 결혼~
아 정말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네요. 저도 한번 덧붙여 볼까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돈을 버셨다고 하더군요.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고물장사 같은 것을 했는데 의외로 일본인들이 그닥 천대를 하지 않고 돈도 그런대로 버셨다고 합니다. 그 반면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소랑 쌀도 빼았아가고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도 할머니께서는 일본놈들 독한놈들 이러시던데...헌데 한국전쟁 때는 경주 산골 완전 촌구석에 사셔서 전쟁이 났을 때도 뭐가 일어났는지 거의 몰랐다고 합니다. 미국은 그래도 소문으로 들어서 알았지만 소련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시더군요. 다만 빨치산에게 밥을 줬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이웃이 있었다고 합니다...외가의 경우에는 외증조할아버지가 스님이셨는데 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끌려가서 졸지에 결혼(...)을 하시게 됩니다. 덕택에 외갓집은 정말로 독실한 불교집안이 되었고...외할아버지께서는 청소년 시절에 징집(선동에 현혹되었다고 했었나?)되어서 일본군에서 전투기를 몰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싸웠는지 아니면 훈련만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전쟁 때에는 군복입고 일하다가 군인들에게 군복 입지 말라고 한소리 듣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엔 군복만큼 좋은 작업복이 별로 없었는데 민간인 식별 때문에 정부에서 민간인이 군복을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하더군요. 전후에는 일본에 가있던 시절 공부를 많이 하셨기 때문에 학교도 세우시고 교장도 하시고 그랬습니다. 퇴임하신지는 오래되었지만 유치원 시절 퇴임식에 갔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아 참고로 작은 외할아버지께선 일본에 그냥 눌러사셔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있다고 합니다. 격동의 시대가 외국에 사는 친척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은...뭔가 신기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간만에 역주행하다가 이 스레가 언급되었길래 찾아 읽어보고, 저도 뒤늦게 글 남겨봅니다.
증조할아버지가 고종때 어의셨습니다. 제사 지낼때 '궁내부주사부군'이라고 쓰던데요.
어의들 가운데 특히 부인병에 전문이셨는데, 명성황후 사후 후비가 된 순헌황귀비 엄씨(엄비) (영친왕 이은의 생모)가 부인병으로 고생하시던 걸 완치시켜주고, 큰 상을 받으셨었답니다. 그때 커다란 화분을 하사받은 게 있는데, 화분은 없어졌지만 그 화분 받침이 아직도 집에 있습니다.
궁을 나오신 후에는 경성 한복판에서 한의원을 여셨는데, 지방에서도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했고, 순서를 기다리느라 며칠씩 집에서 묵어가는 환자들도 늘 있었고, 그런 사람들 먹일 밥을 짓느라 매일 쌀을 몇 말씩 썼었다고 하네요. 우리 할아버지가 외동아들이고 워낙 늦둥이라서 할머니는 맏며느리라도 완전 어린애에 아씨 대접만 받고, 부엌일은 별로 안 해봤대요. 일제때 증조할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의원은 그 밑에서 일 배우던 친척어른이 이어받으셨고, 아직 젊은 할아버지가 물려받은 재산도 어른들이 관리해서 잘 못 챙기셨는데, 그나마도 대부분 전쟁통에 없어졌다는군요.
3.1운동때 이불장 바닥을 이중으로 만들어서 태극기를 보관해 뒀다가 거리로 나온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재산 일부를 금괴로 바꿔서 만주 독립군한테 보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아버지가 그분을 독립유공자 신청을 해볼까 했는데, 경성 한복판에서 제법 유명한 부잣집이다 보니까 일제 관리들이나 헌병들한테 적당히 대접도 해야 했다는 할머니 얘기를 듣고 괜히 친일했다는 소리 들을까봐 포기하셨답니다.
한편 저희 아버지는 김신조 일당 내려왔을 때 군대에서 말년 병장이셨답니다. 한겨울 내무반에서 말년 병장의 잠자리는 빼치카 옆의 가장 따뜻한 자리였대요. 그래서 겨울에도 잘 때는 내의를 벗고 자도 괜찮았다는군요.
그날도 빼치카 옆에서 자다가 새벽에 비상이 걸리길래, 또 훈련상황이겠거니, 대충 군장 챙겨서 나갔다가 인원점검만 하고 다시 들여보내겠지, 하는 생각으로 내의도 제대로 안 챙겨입고 슬렁슬렁 나갔는데, 느닷없이 실탄을 지급하더니, 그 길로 며칠 밤낮을 산속을 헤매 다니느라 쫄따구들보다 훨씬 더 고생하셨다고 합니다.
우리 외할머니 사촌언니가 유관순이었어요..
제 고향이 천안인데.. 외할머니가 병천 토박이세요..(유관순 고향도 천안 병천..)
그 때 얘기 해달라고 조르니까 너무 어려서 잘 기억이 안나고, 등에 한번 업혔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얘기 친구들한테 해주면 잘 안믿더라고요 ㅎㅎ
댓글 달아준 분들 다들 고생은 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얘기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나의 할아버지는...
왜정때 (당신의 표현은 "왜정"이었음!!) 강제로 노역에 끌려갔는데
배에 태워지기 이전에 친구들과 탈출계획을 세우고 있을 무렵
한무리가 탈출하다 전원 사살당했다고...
그 이후 겁먹은 조선인들이 탈출을 하지 않을 것이라 방심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
증조부께서 젊어 급사하시고, 가문이 몰락한 상태에서 왜정을 맞은 할아버지로서는
고난과 역경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하지만,
목숨이 걸린 일생일대의 사건은 이 때가 가장 강렬한 기억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돌아가신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네...
조낸 뒷북이긴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북한에서 사시다가 광복 후 공산당이랑 소련애들이 깽판치는게 싫어서 남쪽으로
내려오셨답니다. 그리고 그 얼마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군에 입대해서 싸우셨다더군요. 그때 전공으로
국가유공자로도 선정되셨구요. 전쟁이 끝난 후엔 계속 군인으로 계시다가 전역하셔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사셨습니다. 근데 군인으로 복무한 기간이 어느 정도 이상만 되면 군인연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할아버지 께서는 거기서 딱 1년이 모자라게 복무하셨다더군요. 그래서 가끔씩 농담으로 '조금만 더 참다
나왔으면 좋았을걸'이라고 이야기 하신답니다.
늦었지만 2010년 새덧글로 달아봅니다.
저희 집은 친할아버지는 6.25 당시 징용을 피해서 북한에서 내려오셨고,
외할아버지는 남한군으로 6.25에 참전하셔서 한쪽 눈을 잃으셨습니다.(유공자심)
그런데도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하셨다는게 대단.. 한건가? ^^;
뭐 친할아버지가 북한군은 아니었지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띠동갑이신데 (결혼 당시 18세-30세)
할머니 말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고 남자가 없어서였다고;
아쉬웠던 기억은 덕분에 집에 족보가 없어서 이거 관련한 숙제나, 사람들이 물어볼때 곤란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잘 모르셨거든요. 전주 이씨라는 거 말고는.
몇대 손이냐 이런거 물어볼 때마다 참..
이 나이에 모른다고 하기도 그렇고, 사정 이야기하도 그렇고;;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유공자인 걸로는 대학 갈 때 아무 혜택이 없더군요.. 쩝.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
집안이 부산토박이라 전쟁에 관한 건 거의 들은게 없고
아버지가 박정희 시절에 군복무를 전경에서 했는데 그때 군대는 다들 배고프고 짬밥도 쓰레기 똥국 수준이었지만 아버지가 복무하던 부대는 대통령을 호위해야 된다 그래서 매일매일 빵 나오고 닭백숙 나오고 장난이 아니었답니다. 전투력 유지해야 된다고 빵 나오면 그 날 안에 무조건 다 먹어치워야 했는데 그래서 부대에 산더미 같은 빵이 전부 이등병들 몫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배고프던 시절에 아버지 부대에서는 질린다고 빵을 안먹었답니다...지금도 전경들한테 곧잘 빵 배급 나오는 모양인데..아마 그 시절과 의미는 다르겠지만요.
당시에는 군대도 지역감정이 심해서 장난이 아니었다고 함. 계급 문제를 초월해서 지역별로 소대가 분열했다고 합니다. 해태랑 롯데랑 야구 경기하는데 그걸로 전라도 선임병이 경상도 후임들을 갈구자 중간 계급이었던 아버지가 들고 일어서서 싸우고 그게 커져서 결국 소대 전체가 패싸움을 벌였다고 함. 당시 아버지는 그 전라도 선임한테 맞아서 이가 다 부러지고 잇몸이 터져 나가서 결국 젊은 나이부터 틀니를 하셨다고 합니다.
또 당시에 전투력 키운다고 무조건 권투를 시키는데 이게 체계적으로 가르치는게 아니라 그냥 무식하게 두들겨패고 밟는거라 어느날 맞고 쓰러져서 뇌막염? 인가가 와서 죽을 뻔했는데 당시에는 이게 불치병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근데 신약이 나와서 타이밍 좋게 살았다고....
당시 군대동기였던 아저씨랑 계속 동업을 하고 있는데 제가 가끔 볼 때마다 아저씨가 그러심..[너네 아버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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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1등
울었다.
대충 읽다 흠칫
직업을 가져라
어쩐지 정답 ww
=_=
.... 슬프다....
그러게 왜 그러셨어요.
당신과의 결혼이라니!
그 여자에게 당장 사과하세요.
아침ㅡ방금전에 일어난 실화ㅡ에 대해서 일어난 문제를 아내와 풀지 않고 2ch vip에 와서 글을 썼다는 것 부터가 이미 ....
아내도 VIP를 한다면...
너 따위에게 줄 밥은 없어!!
라는 뜻이겠죠 ..
그렇군요, 직업이 없는것이군요 …
여러가지 잘못한 일 이라니...
몇개나 있는거야...
식스센스.....?
그냥 꿈에서 깨면 되는데....
잠깐 그거 좀 (....)
오....그거다... 얼른 깨면 되겠구나...
꺠고나면 아내고 뭐고 다 없어져있고
방에 홀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겠쥬..
무의미하게 어제 보던 애니가 틀어져있는 화면이라거나.. 자기가 없어도 잘만 돌아가는 오토 먹여둔 RPG게임이라거나..
결국 꿈에서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거군요
(뭐가?)
일해라.
여보.. 쌀이 다 떨어졌어요....
아, 자식부터 먹이고 보자는 심산인 건가요..
쌀이 떨어졌어... 벌지 않는 자 먹지도 말지니..
뭘 얼마나 잘못한걸까,,,
알면 얼른 빌어라.
직장이 있고없고의 이야기가 아니라..찔리는게 너무 많은 유부남의 긴장감과 그상황에서 현실도피 해버리는게 재밌는 이야기 인데 다들 이상한쪽으로....
그건 전파만세의 기혼자율이 압도적으로 낮기때문일겁니다.
아마.
이거 소설 ZOO에 나오는 단편이랑 비슷한데요 ㅋㅋㅋㅋ
앗, 기억납니다. 오츠 이치씨 책이죠;ㅂ;/
예전에 4개짜리였나, 먹을 것 사와서 큰딸 안 주고 나머지 가족이 먹은 것 기억나는 군요.
이럴 경우 아이의 밥을 먹으면 됩니다.(...............)
저럴땐 당당하게 직접 밥을 양껏 담아먹는겁니다!
...그나저나 저 상태에서 존재감 확인하느라
아내 눈앞에서 손 흔들며 "안보여? 안보여?"하면
한대 맞을지도...
그냥 아이의 것을 먹습니다.
그냥 아내의 것을 먹습니다.
그냥 굶습니다.
그냥 아내를 먹습니다.(?!)
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