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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31 나의 할아버지 (44)

중학교 시절, 흔히들 그렇듯이 한때 삐뚤어진 젊음을 동경했다.
도둑질이나 약한 아이들에 대한 협박 등을 반복하던 그때-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점원에게 잡혀, 부모님의 연락처를 불게 되었다.
부모님은 안계시다고 거짓말을 하고 어차피 할아버지는 왕진을 가셔서 안 계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말했다.

그러나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곧바로 흰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가 가게로 달려오셨다.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마루바닥에 이마를 조아리고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사과를 하셨다. 어릴 적부터 나의 자랑이었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보기 흉하게 굴욕적으로 사죄를
비는 모습을 보노라니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져서 나도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바닥에 어느샌가
머리를 조아렸다.

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쭉 아무 말도 없었다.
역정을 내시지도, 뭔가를 묻지도 않고 그저 침묵.
오히려 그게 더 괴로웠다.

집에 곧 도착한다, 싶을 무렵 갑자기 할아버지가

「너 술 마신 적 있냐?」

하고 물으셨다.

「없어요」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좋아, 가르쳐주마」

하고 한 마디 하신 후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착한 앞은 스넥바 같은 곳.
거기서 취할 때까지 술을 먹게 되었다.
평상시 일하는 모습 밖에 본 적 없는 할아버지가
술 마시는 것을 보는 것도,
함께 이런 곳에 있는 자체가 어쩐지 이상했다.
두 사람 모두 만취한 상태로 돌아가는 길 인근의 강가에
앉아 쉬고 있자 할아버지가 불쑥

「이 할애비는 일 밖에 몰랐어.
 너는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다 경험해볼 수 있으니 부럽구나. 
 너는 남자다.
 가끔은 나쁜 짓을 해보고 싶기도 할게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좋다.
 다만 인생을 그르칠 정도로 큰 나쁜 짓은 저지르지 말거라」

그 말을 들으니 왠지 긴장의 실이 끊어지며 한참동안이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내 삶이 바뀌었다.
할아버지같은 의사가 되기로 결정,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재수까지 해가며 국립대 의학부에 합격했다.

올해, 졸업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낡은 집 외에
또 하나 남겨 준 것.
그것은 매일 목에 걸고 계셨던 청진기.
그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때에도 목에 걸려 있던 청진기.
그 청진기를 겨우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녹이 슬어버렸지만 그래도 나의 보물.

나도 할아버지같은 의사가 되고 싶다.